일상 15

책상 정리

(탁진현, 홍익출판사, 2017) 가장 단순한 것의 힘 10년간의 기자생활을 뒤로하고 미니멀리스트로 거듭난 저자가 단순하게 일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물건으로 가득한 방, 잡일에 치이는 사무실, 걱정으로 시끄러운 마음은 모두 일 www.aladin.co.kr '빈 책상이 부른 기적' 일을 시작할 때 아무것도 없는 책상을 마주하면 매일이 새로 시작되는 날처럼 느껴진다. 하루 새 해이해진 의지를 아침에 다잡고 일을 착수할 수 있다. 나의 머릿속과 책상은 매일 포맷된 상태다. (80쪽)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마주하면 뭐라도 시작할 기분이 든다. 그게 매일 하는 일이라도 산뜻한 기분을 주는 건 사실이다. 아예 비어있다시피한 책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사실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최소한..

단상노트 2023.05.11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하루

흉추 압박골절로 집에서 쉬고 있다. 앉거나 서 있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니 주로 누워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이 늘어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를 보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쉬는 것도 해본 사람이 잘 하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뭘 할지를 고민하고 계획하고 있는 나도 참 웃프다. 일단 메모하고 기록하고 글쓰는 일을 일상으로 삼기로 했다. 잘 쓸 자신도 없고 특별한 소재도 없지만 그냥 쓰기로 했다. 내 삶에 좀 집중하거나 심플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서. 오늘은 책상도 정리했다. 되도록 비우기로 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채우고 쌓는 일에 익숙한 삶이어서 그런가 비우고 덜어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것도 노력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다. 책상을 정리하면서 방안에 쌓인 책들을 하..

단상노트 2023.05.10

유치원 가는 길/ 엄마의 하루

frog in the forest by cotaro70s 비 오는 아침, 눅눅하고 우중충한 창, 오늘따라 무거운 몸에 조금 게으름을 피우다 아이들 등원시간에 늦었다. 때마침 고장 나 1시간이나 느려진 벽시계 탓을 해보기도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마음 같아선 아이들에게 뭔가 따뜻한 것을 먹이고 싶은데 염분이 적은 치즈스틱만 한 개씩 먹여 옷이나 겨우 입히고 일어섰다. 큰아이는 원복에 빨간 점퍼를 입히고 진한 곤색의 장화를 신기고 좋아 죽는 파워레인저 그림의 투명 우산을 들렸다. 작은 아이는 진홍색 바바리를 입히고 까만 에나멜 구두를 신겼지만 아직은 혼자 우산을 들고 걷기엔 어려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듯 스타일 빠지게 등에 업고 커다란 파라솔 우산을 썼다. 그래도 등에 업힌 채 좋아 죽는다. 아이들..

단상노트 2014.04.28

'미개한' 엄마가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아내가 정몽준씨 막내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몽준씨 막내 아드님... 넌 스무 해 가까이 살면서도 네가 말한 그 미개하도록 절절한, 가슴으로 하는 사랑을 느껴보지 못 한게로구나. 네가 받은 사랑은 그저 부족함 하나 없는 환경, 때 되면 지분이나 나눠주는 그런 사랑이었나보다. 하지만 있잖니, 네가 얼마를 가졌는지 알 순 없지만 네가 가진 그 전부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종종 있단다. 넌 그 중에 가장 큰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친구 간의 아기자기한 진정한 우정도 알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 살아가며 서로 간에 느껴지는 사람사는 냄새도 알지 못하고, 무엇보다 세상 속에 녹아있는 따뜻함의 단 한 자락도 평생 느끼지 못 할거야. 스무 살이 다 된 네게 마음이란 없는 것 같으니... 그것을 숨기..

단상노트 2014.04.26

세월호의 기적, 일상의 기적

일상으로 돌아가며 흔히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아쉬워한다. 여행은 그만큼 좋았던 일이고 일상은 돌아가기 싫은 거다. 그런데 세월호와 함께 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일상마저 빼앗겨 버렸다. 그 아이들에게는 여행과 일상이 죽음과 삶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일상과는 너무도 다른 ‘사건’을 접하며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도 그렇고 그런 일상으로 돌아올 때면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낸 것처럼 지낸다. 일상을 빼앗긴 아이들과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들. 삶을 빼앗긴 아이들과 삶을 지속하는 우리들. 물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비난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저 그렇고 지겹다고 말하는 ‘일상’에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그 아이들과는 너무도 다르면..

단상노트 2014.04.24

2013년 마지막 단상

하루의 단상들... 1. 책을 읽고 있구나. 예전엔 책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그러니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 빽빽이었는데, 지금은 알려고 노력하고 생각하는 힘도 제법 생겨나고하니 여튼 좋다. 그래서 책을 읽고는 있구나 싶다. 2. 책을 읽으니 폭은 적당히 좁아지면서도 깊이가 생기는 느낌이다. 하지만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하는 기분에 도취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3. 책도 함께 읽으면 좋다.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하면서 느낀 것. 아마도 이 모임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 독서력도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렀을 듯. 의무감이든 책임감이든 좋다.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4.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

단상노트 2014.01.03

아름답지 아니한가_2013.11.25

아름답다. 아침에 비가 내려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는데, 불긋 단풍잎으로 수놓아진 광경이 아름답고 예쁘더라. 내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말은 '아름답다'이다. 그 말이 쑥쓰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자연의 풍경이 아름답고, 어느 한 순간이 감동적일 만큼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답고, 인생의 어느 때쯤이 아름답고.... 삶이 온통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있으니 '아름답다'고 말할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더구나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또 있다면, 그래서 그걸 나누고 있다는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저쪽에서, 섭샘은 이쪽에서 이 풍경을 서로 다른 시간대이지만 바라보았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너도 그렇..

단상노트 2013.11.25

TV와 리모컨

야자감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다들 피곤한 하루였을 거다. 진서는 유치원부터 놀이터까지 줄기차게 뛰어놀았을 거고 연우는 오늘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가서 정신없었을 거고 아내는 늘 그렇듯 이 두 녀석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돌봐 기진맥진했을 거니 말이다. 나도 오늘따라 피곤에 지친다. 집에 들어와 씻고 책 하나 들어 거실에 앉아 있으니 정면으로 시커먼 TV 화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거나 보자 싶어 리모컨을 찾으니 없다. 평소 있을 만한 자리를 뒤지고 뒤지고 뒤져도 없다. 요즘 연우가 이것저것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두는 터라 연우가 그랬구나 싶지만 자고 있는 연우를 깨운들 말해줄리 없다. 사실 아직 말도 못하니. 됐다싶어 거실에 벌렁 누우니 괜한 오기가 생긴다..

단상노트 2013.11.05

너는 누구고

2 노란 색이면 개나리겠지 싶었다 처음엔 붉은 단풍나무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었다 봄 사진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붉은 건 단풍나무, 분홍빛은 진달래, 노란 건 개나리겠지 싶었다 그런데 ‘개나리가 아닌데, 개나리가 아닌데’ 실망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은 없고 잎사귀가 노랗게 봄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란 건 개나리가 아니라…… ? 노란 건 개나리뿐인 내 머리는 두 눈보다 앞서지만 개나리 아닌 걸 개나리로 부를 만큼 아둔하고 성급하다 미안하구나, 네 이름을 꼭 불러주마 그걸 앞에 두고 한없이 작게 옹그리며 앉아 노란 그 무엇에게 약속을 한다 저편 학교 잔디밭 봄 햇살과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보며 나는 ‘너는 누구고, 너는 누구고’ 한다 _2013년 4월 25일

단상노트 2013.04.26

정일 선생

1 마징가가 불렀나 독수리 오형제가 불렀나 내가 놓아둔 시집 한 권*을 커다란 정일 선생이 집어든다 한쪽에서 창밖 봄 풍경에 젖어 졸고 있는 나는,찬찬히 들여다보다 정성스레 두 손으로 펼쳐든 시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순간 잠에서 깬다 마음을 들썩이며 아름답게 반짝이던 봄날의 풍경보다 시집 안에서 걸어나오는 마징가와 만나고 독수리 오형제와 만나는 그가 더 눈부신 순간이다 우주쇼보다 진귀한 장면이더라 경이로운 순간이더라 정일 선생이라서가 아니라 시가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그만이 가진 그 순간이 크고 아름답더라 * 정일 선생이 읽은 시집은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창비, 2005)이다.

단상노트 201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