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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정말 '끝'이라 생각한 일은 많지 않다. 절망이나 아픔의 상처가 깊지 않은 인생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잘한 실패들은 일상에서 늘 겪는다. 그리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금세 잊고 산다. 때로는 하루살이 같다는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수업준비를 할..

메모노트 2021.10.28

너는 바다고 길이다.

정호승 시인의 '무인등대'를 읽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 배가 가는 길이 바닷길이 되기도 하고, 바다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바닷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등대는 그 바닷길을 비춰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야 어떻게 똑같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사는 방식도 다르고 살아가는 이유도 다르듯 사람마다 걸어가는 길은 넓은 바다의 정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바닷길처럼 무수히 많을 수 있다. 그렇기에 바닷길을 비춰주는 등대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 내 인생의 롤모델인 사람이 등대이기도 하고, 내가 꿈꾸는 삶의 목표가 등대이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등대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나 자신이 누군가의 등대가 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 삶을 살아가는 건 결국 '나'이지, 내가 등대로 여기는 사람이 내 삶을 살아주는 건..

메모노트 2014.04.03

매일 한 편의 시라도...

매일 한 편의 시라도 읽기로 결심했다. 시집을 읽다보면 하루에도 열 편도 넘게 읽을 수 있지만, 매일 시집을 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다가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도 그 유명한 시인의 시집 한 권 사지 않고 문제집 속에 선별된 시들만 읽어대는, 그리고 그걸 쪼개고 나누고 흩어놓는 식으로 가르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해본다. 그래서 매일 시 한 편은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두 권을 사서 읽고 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 을 읽으며 단상이라고 적을 요량으로 이 글을 쓴다. 이슬의 꿈 이슬은 사라지는 게 꿈이 아니다 이슬은 사라지기를 꿈꾸지 않는다 이슬은 햇살과 한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슬이 햇살과 한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나는 한..

메모노트 2014.04.03

그 샘(함민복)

그 샘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3학년 올기에게 빌려주었던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을 몇 달이 지나서야 돌려받았다. 그간 이 시집을 내가 샀던가 싶게 잊고 있었던 터라, 마치 선..

메모노트 2014.03.17

늙어가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신경림의 『사진관집 이층』을 읽고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을 읽다. 사진관집이층신경림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시 지은이 신경림 (창비, 2014년) 상세보기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제집에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갈대’, ‘농무’만을 읽어댔던 내가 서점에서 우연하면서도 반갑게 집어든 시집이 (2014)이었다. 신경림 시인이 1935년생이니, 올해로 80세를 맞으신 거다. 그간 신경림 선생은 숱한 시들을 썼을 거고, 시를 가르치는 나에겐 그중에서 잘 알고 가르친 시라곤 앞의 세 편이 전부였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한 권조차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시집을 산 날, 아이들과 아내가 곤히 잠들어있던 이른 새벽 이 시집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정성껏 읽었다. 마지막 시를 읽고 ..

메모노트 2014.02.04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나무이다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나무는 자기..

메모노트 2013.06.28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지금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그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메모노트 2013.06.2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누구의 슬픔인가, 누구의 기쁨인가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메모노트 2013.06.07

가재미(문태준), 서해(이성복)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

메모노트 2013.05.22

생의 다른 생(백무산)

생의 다른 생 -백무산 싸락눈 소복 담긴 낡은 새둥지 하나 키 낮은 싸리나무 기둥에 간신히 달린 집 한 채 봄날 근사한 집 짓고 예쁜 짝 만나 가족 이루고 재잘재잘 한철 산다 찬바람 속으로 떠나보냈네 뿔뿔이 둥지마저 버리고 긴 겨울 골짜기 나무처럼 울다 다시 봄날 처음 날 듯이 날갯짓하네 새집 짓고 새짝도 만나 첫봄 맞듯 처음 살 듯 다시 산다네 새들은 몇 번의 생을 살다 가는 것일까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

메모노트 201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