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27

'미개한' 엄마가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아내가 정몽준씨 막내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몽준씨 막내 아드님... 넌 스무 해 가까이 살면서도 네가 말한 그 미개하도록 절절한, 가슴으로 하는 사랑을 느껴보지 못 한게로구나. 네가 받은 사랑은 그저 부족함 하나 없는 환경, 때 되면 지분이나 나눠주는 그런 사랑이었나보다. 하지만 있잖니, 네가 얼마를 가졌는지 알 순 없지만 네가 가진 그 전부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종종 있단다. 넌 그 중에 가장 큰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친구 간의 아기자기한 진정한 우정도 알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 살아가며 서로 간에 느껴지는 사람사는 냄새도 알지 못하고, 무엇보다 세상 속에 녹아있는 따뜻함의 단 한 자락도 평생 느끼지 못 할거야. 스무 살이 다 된 네게 마음이란 없는 것 같으니... 그것을 숨기..

단상노트 2014.04.26

세월호의 기적, 일상의 기적

일상으로 돌아가며 흔히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아쉬워한다. 여행은 그만큼 좋았던 일이고 일상은 돌아가기 싫은 거다. 그런데 세월호와 함께 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일상마저 빼앗겨 버렸다. 그 아이들에게는 여행과 일상이 죽음과 삶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가. 일상과는 너무도 다른 ‘사건’을 접하며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도 그렇고 그런 일상으로 돌아올 때면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낸 것처럼 지낸다. 일상을 빼앗긴 아이들과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들. 삶을 빼앗긴 아이들과 삶을 지속하는 우리들. 물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비난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저 그렇고 지겹다고 말하는 ‘일상’에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그 아이들과는 너무도 다르면..

단상노트 2014.04.24

과자 봉지 뜯어줄까?

저녁시간 아이들이 교정에서 왁자지껄 놀고 있는 걸 보러 중앙계단으로 나오니 대학에 다니고 있는 졸업생 하나가 서 있었다. 대화는 거기서 시작됐다. 대학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은 걸 해보고 있는데, 딱히 자기가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나 공부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고, 그래서 어떤 일에 푹 빠져 공부하고 경험하며 지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나도 그때쯤 했었던 고민인데, 딱히 만족할 만한 답을 해주진 못했다. 그냥 아이들과 상담하면서 늘 하는 말로, 아직 그걸 확실히 정할 수 있을 만한 나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을 잔뜩 펼쳐보고 고민하는 나이라고만 ..

단상노트 2014.04.16

모두가 반장이고 부반장이 되면?

반장과 부반장의 차이 해마다 반장 선거는 참 어렵다. 선거 방식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나름 경쟁이 치열할 때도 있으며, 희비가 엇갈릴 때에는 축하만큼이나 안타까움이 클 때도 있다. 그리고 누구나 반장을 하려고 나오지 부반장을 하려고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인가 후보자의 말을 들어보면, "제가 반장이 된다면~"이라고 하지 "제가 부반장이 된다면~"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는 선거 방식과도 관련이 있겠지. 선거도 '최다 득표자가 반장, 그 다음 순위 득표자가 부반장' 식으로 순서대로 학급 임원 자리를 맡기니깐. 그런데 정말 '나는 부반장이 하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을까? 반장이라고 하면 앞에 나와서 말도 잘해야 하고 아이들을 잘 이끌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고..

단상노트 2014.03.20

첫 만남과 무리수 140303

무리-수無理數 명사 1 . 실수이면서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수. 예를 들어, , log2, π [같은 말] 3.14159… 따위가 있다. 2 .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거나 정도를 지나치게 벗어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온 시각이 대략 12시 가까이 되었으니, 첫 담임을 만나는 설렘만큼이나 점심을 먹고 싶은 식욕도 들고 일어날 시간이었을 거다. 더구나 담임이 처음 들어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우선 전달사항이 있다.'면서 학생카드를 잔뜩 나눠주고 사진은 몇 장 어디에 붙여오고 여분으로 몇 개를 가져오라는 등 신신당부를 했으니... 여기서부터 내가 무리수를 두려고 작정을 한 거다. 한참을 그런 이야기만 하다가 이제 내가 준비해온 걸 부끄럽게 꺼내들었는데, 그게 ..

단상노트 2014.03.08

2013년 마지막 단상

하루의 단상들... 1. 책을 읽고 있구나. 예전엔 책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그러니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 빽빽이었는데, 지금은 알려고 노력하고 생각하는 힘도 제법 생겨나고하니 여튼 좋다. 그래서 책을 읽고는 있구나 싶다. 2. 책을 읽으니 폭은 적당히 좁아지면서도 깊이가 생기는 느낌이다. 하지만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하는 기분에 도취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3. 책도 함께 읽으면 좋다.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하면서 느낀 것. 아마도 이 모임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 독서력도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렀을 듯. 의무감이든 책임감이든 좋다.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4.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

단상노트 2014.01.03

아름답지 아니한가_2013.11.25

아름답다. 아침에 비가 내려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는데, 불긋 단풍잎으로 수놓아진 광경이 아름답고 예쁘더라. 내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말은 '아름답다'이다. 그 말이 쑥쓰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자연의 풍경이 아름답고, 어느 한 순간이 감동적일 만큼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답고, 인생의 어느 때쯤이 아름답고.... 삶이 온통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순간들이 내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있으니 '아름답다'고 말할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더구나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또 있다면, 그래서 그걸 나누고 있다는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저쪽에서, 섭샘은 이쪽에서 이 풍경을 서로 다른 시간대이지만 바라보았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너도 그렇..

단상노트 2013.11.25

TV와 리모컨

야자감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다들 피곤한 하루였을 거다. 진서는 유치원부터 놀이터까지 줄기차게 뛰어놀았을 거고 연우는 오늘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가서 정신없었을 거고 아내는 늘 그렇듯 이 두 녀석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돌봐 기진맥진했을 거니 말이다. 나도 오늘따라 피곤에 지친다. 집에 들어와 씻고 책 하나 들어 거실에 앉아 있으니 정면으로 시커먼 TV 화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거나 보자 싶어 리모컨을 찾으니 없다. 평소 있을 만한 자리를 뒤지고 뒤지고 뒤져도 없다. 요즘 연우가 이것저것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두는 터라 연우가 그랬구나 싶지만 자고 있는 연우를 깨운들 말해줄리 없다. 사실 아직 말도 못하니. 됐다싶어 거실에 벌렁 누우니 괜한 오기가 생긴다..

단상노트 2013.11.05

너는 누구고

2 노란 색이면 개나리겠지 싶었다 처음엔 붉은 단풍나무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었다 봄 사진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붉은 건 단풍나무, 분홍빛은 진달래, 노란 건 개나리겠지 싶었다 그런데 ‘개나리가 아닌데, 개나리가 아닌데’ 실망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은 없고 잎사귀가 노랗게 봄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란 건 개나리가 아니라…… ? 노란 건 개나리뿐인 내 머리는 두 눈보다 앞서지만 개나리 아닌 걸 개나리로 부를 만큼 아둔하고 성급하다 미안하구나, 네 이름을 꼭 불러주마 그걸 앞에 두고 한없이 작게 옹그리며 앉아 노란 그 무엇에게 약속을 한다 저편 학교 잔디밭 봄 햇살과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보며 나는 ‘너는 누구고, 너는 누구고’ 한다 _2013년 4월 25일

단상노트 2013.04.26

정일 선생

1 마징가가 불렀나 독수리 오형제가 불렀나 내가 놓아둔 시집 한 권*을 커다란 정일 선생이 집어든다 한쪽에서 창밖 봄 풍경에 젖어 졸고 있는 나는,찬찬히 들여다보다 정성스레 두 손으로 펼쳐든 시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순간 잠에서 깬다 마음을 들썩이며 아름답게 반짝이던 봄날의 풍경보다 시집 안에서 걸어나오는 마징가와 만나고 독수리 오형제와 만나는 그가 더 눈부신 순간이다 우주쇼보다 진귀한 장면이더라 경이로운 순간이더라 정일 선생이라서가 아니라 시가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그만이 가진 그 순간이 크고 아름답더라 * 정일 선생이 읽은 시집은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창비, 2005)이다.

단상노트 201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