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첫 만남과 무리수 140303

onmaroo 2014. 3. 8. 04:28

무리-수

명사
 1 . <수학> 실수이면서 분수형식으로 나타낼없는 수. 들어, , log2, π [같은 말] 3.14159… 따위가 있다.
 
2 . 도리이치맞지 않거나 정도지나치게 벗어나는 비유적으로 이르는 .

  1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온 시각이 대략 12시 가까이 되었으니, 첫 담임을 만나는 설렘만큼이나 점심을 먹고 싶은 식욕도 들고 일어날 시간이었을 거다. 더구나 담임이 처음 들어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우선 전달사항이 있다.'면서 학생카드를 잔뜩 나눠주고 사진은 몇 장 어디에 붙여오고 여분으로 몇 개를 가져오라는 등 신신당부를 했으니...
 여기서부터 내가 무리수를 두려고 작정을 한 거다. 한참을 그런 이야기만 하다가 이제 내가 준비해온 걸 부끄럽게 꺼내들었는데, 그게 박노해의 '도토리 두 알'이라는 시. 
 '이건 뭐지?' 하는 목소리도 간혹 들리고 눈동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 시를 찬찬히 읽어 준다.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박노해, '도토리 두 알' 
 시만 읽어주었다면 여운이라도 남았을 텐데, 내가 이 시를 읽어준 이유를 이해할까 걱정부터 한 나머지 설명이란 걸 했다. 이게 또 무리수.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고 있었으니 역시 무리수. 도토리 같은 녀석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엉덩이가 들썩 거린다. 

물론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모두 하나하나 소중하고 튼튼하고 어엿한 참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겠다는 이야기야 선생노릇을 하려는 나에게도, 그런 나와 한 반에서 일 년을 살아갈 아이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순서와 시간 아닌가. 아마도 여기서 첫 만남의 시간을 마무리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 같다. 그런데....

  2
 
그런데 내가 준비한 건 또 있었다. '명함'!
 몇 년 전부터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악수를 하면서 나눠주고 있는 게 명함이다. 명함은 대체로 아무나 주지 않지 않은가. 나를 정식으로 소개하며 건네는 명함은 상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중이나 부탁의 의미도 담겨 있으니, 나 역시 담임으로서 잘 부탁한다는 뜻에서 명함을 건넨다. 아이들은 마치 자기도 어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좋아는 한다. 존중받는 느낌? 
 그런데 아이들 이름을 호명하며 1:1로 악수와 명함을 건네도 뭔가 반 분위기가 그걸 지켜보는 분위기이기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명함을 받고 들어간 아이나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그렇게 친해졌는지 웃고 떠들기 바쁘다. 눈치로 보건대 서로 건네는 웃음과 이야기 속에는 명함에 대한 화제는 없는 것 같다. 명함 건네는 일을 멈출 수도 없고....

 

 아내에게 부탁해서 만들었고, 뒷면에는 아까 읽어 준 시 구절까지 정성스레 넣은 명함이라구! 이 도토리 같은 녀석들아....
  그래도 시 읽고 나서 멋쩍은 나를 보고 박수라도 쳐주고, 문자로 도토리 시 인상 깊었다는 말도 남겨준 걸 보면 내 노력이 가상함을 이해해준 도토리들이라 다행이다 싶다. 
 
3
 '무리수를 두다'란 말은 흔히 써도 '유리수를 두다'란 말은 쓰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그에 맞는 적절한 수준과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예의, 배려, 존중을 갖추지 못하면 관계든 소통이든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소한 '무리수'를 두려고는 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느 정도나 수준을 지켜야 '유리수'가 될지에 대해서는 어떤가. 사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떻게 해야 자기한테 유리할까를 따지는 일은 흔하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줄 알아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내심 자기 잇속만을 차리려는 사람들이야 흔하지 않은가.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공부 잘 하는 아이랑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공부 못하는 아이랑은 친구하면 내게 손해 아닐까 생각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런 '유리수'만을 따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나. 그런 분위기 때문이랄까, '유리수를 둔다'란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리고 교실에서 '무리수'를 두었다면, 그건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의 탓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교육적 의도를 두고 교실 안에서 '무리수'를 두었다고 한들, 그게 무리수가 되는 건 아이들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미성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살고 있는 교실을 이해하지 못한 선생의 탓이 크지 않을까. 나 역시 첫 만남, 그 시간과 일의 순서와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무리수를 둔 것 아닌가. 
 일에는 순서가 있고 맥락이 있고 분위기가 있으며 정도가 있다. 아마도 내가 아차 싶은 건 내가 준비해간 것들의 순서와 정도의 문제다. 짧고 굵게 내 진심과 의도를 전달했어야 했나 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가지 수를 아이들에게 던지기보다는 단 하나를 제대로 전하는 게 훨씬 나을 때가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많은 걸 하고 싶을 때가 많다. 50분의 수업에서도 단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좋은 수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종례는 늘 길다. 짧고 굵고 선명한 종례가 올해 숙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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