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그 샘(함민복)

onmaroo 2014. 3. 17. 19:34

그 샘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3학년 올기에게 빌려주었던 함민복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을 몇 달이 지나서야 돌려받았다. 그간 이 시집을 내가 샀던가 싶게 잊고 있었던 터라, 마치 선물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 읽어도 함민복 시집은 늘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물을 보는 눈도 인간애가 가득해 읽고 나면 때론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때론 훈훈하기도 하고 때론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언제든 아이들과 시인의 시집을 같이 읽고 기회가 된다면 시인을 초대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싶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사이 그 샘이란 시가 머리에, 가슴에 오래 남는다. 네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에 맑은 샘물을 길러 가는 길은 단 하나. 그래서 새벽 물 길러 가는 인기척마저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순번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양보라듯 하듯 서로 겹치지 않게 맑은 샘물을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넉넉하지 못한 물이지만 마음만은 넉넉하게 만드는 샘물이 된다.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 학교에서 배움의 장소와 시간은 똑같은데 배움은 즐거움이 아니라 경쟁의 과정이 되고 만다. 내가 배운 걸 너와 나누며 우리가 하나의 샘물을 양보라도 하듯 나누어 마실 수는 없는 걸까. 한 교실에 앉은 많은 아이들이 모두 하나의 시라는 샘물을 앞에 두고 하나씩 하나씩 물을 길러 오고 있는데, 그 순간만큼은 순번조차 필요없는 평등하고 넉넉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시라는 샘물을 길어 마시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넉넉해지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샘물로 가는 길이 어쩌면 하나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
 
 

 학교 안에 있어야 할 것들.  성장, 우정, 배움의 즐거움.
 3
년이라는 시간과 이화외고라는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아이들. 스스로 성장하는 보람과 서로를 사랑하는 우정과 배움 그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그 시간과 공간 안에 깃들어 있는 샘물과 같다. 내가 아닌 너가 그 샘물을 먼저 길러 간들 시기하거나 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가 너에게 양보한들 누가 나를 바보 같고 미련하다고 욕하겠는가. 인생에 있어 고등학교 3년은 넉넉하지 않은 샘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3년이 누구에게나 가장 넉넉하고 크고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하면 될까
 3월. 학기가 시작되고 학년이 시작되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아이들이든 선생이든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2014.03.17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