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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이문재)

onmaroo 2021. 10. 28. 16:11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정말 '끝'이라 생각한 일은 많지 않다.
절망이나 아픔의 상처가 깊지 않은 인생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잘한 실패들은 일상에서 늘 겪는다. 그리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금세 잊고 산다.
때로는 하루살이 같다는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수업준비를 할 때면 매년 달라지는 교재나 커리에 맞게 하루짜리 수업을 하는 기분이다.
뭔가 시작하고 싶고 지속하고 싶은데 선뜻 시작하기도 어렵다. 마흔 중반의 나이가 그런가 보다.

하루가 끝나면 새로운 하루는 시작된다.
매일을 경험해도 끝이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걸 몰랐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스스로 낼 줄 몰랐던 것 같다.
끝이 시작이 되고, 시작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바퀴를 굴리듯 삶을 굴리는 힘이
때로는 버겁고 두렵더라도 의미가 있는 건
그것이 나와 너와 우리의 삶이기에 그렇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문정희, '율포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