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늙어가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신경림의 『사진관집 이층』을 읽고

onmaroo 2014. 2. 4. 17:00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을 읽다. 

사진관집이층신경림시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시
지은이 신경림 (창비, 2014년)
상세보기


 아이들을 가르치며 문제집에서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갈대’, ‘농무만을 읽어댔던 내가 서점에서 우연하면서도 반갑게 집어든 시집이 <사진관집 이층>(2014)이었다. 신경림 시인이 1935년생이니, 올해로 80세를 맞으신 거다. 그간 신경림 선생은 숱한 시들을 썼을 거고, 시를 가르치는 나에겐 그중에서 잘 알고 가르친 시라곤 앞의 세 편이 전부였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한 권조차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시집을 산 날, 아이들과 아내가 곤히 잠들어있던 이른 새벽 이 시집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정성껏 읽었다. 마지막 시를 읽고 책장을 덮을 때에는 나도 이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주저없이 들기도 했다.

 이 시집은 시인의 나이만큼이나 늙음의 고운 결들을 느끼게 하는 시집이다. 아직 마흔도 안 된 나로서는 늙음에 대해 되새길 만한 나이도 아니며, 노인의 얼굴에 패인 주름들처럼 늙음의 곱고 깊은 결들을 느낄 만한 세월을 보낸 것도 아니지만, 늙는다면 이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하게 된다.


늙음
, 아름다움에 눈 뜨다.

 
 
늙는다는 일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되는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전문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두워지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보는 눈이야, 사람을 보는 눈이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야 어두워질까.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게 나이를 먹는 일일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상도, 사람도, 인생도 보잘것없거나 더럽거나 헛되게 보기보다는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름답다란 말이 누구의 입에서보다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 그게 나이를 먹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다시 느티나무가전문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발견하고,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나이를 드는 일은 사람이 경험하는 일 중에 가장 값진 것이 되지 않을까.


그리움에 젖어 바라보다
.

 하지만 늙는다는 일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며, 그럴수록 는 세상에 우뚝 선 가장 크고 중요한 존재로 느끼기보다는 세상의 작은 일부이며 자연의 하나로도 만족스러운 존재로 느끼게 된다. 그게 삶에 대한 예의이자 겸손이라는 걸까. 그리고 이 또한 지난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의 크기도 그만큼 커지기도 하는 일이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초원

 

 ‘늙음그리움을 불러온다.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보다 훨씬 많으니, 그리움이 커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부모의 나이가 되었을 때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떠올리곤 한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중략)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중략)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

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

                 -‘안양시 비산동 48943’

 

  어머니는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아버지는 미운 마음으로 그리워한다. 부모의 나이쯤 되면 부모가 그리워지는 마음이야 어찌할 수 없는 인간다운 마음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추억으로 오르고, 그러면 아내가 그리운 날들로 돌아가고 스무 살의, 어린 시절의 로 되돌아간다.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 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

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로 신발이 더럽다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섞여 화장실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

(중략)

지금도 밤늦게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시인은, 몸은 떠난 지 마흔 해가 지났어도 마음만은 아직도 가난한 시절의 아내와 함께 홍은동 산 일번지에 살고 있다. 시인은 가난한 시절을 함께 보낸 아내가 그립다. 아내가 곁에 없다면, 아내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은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울 때면, 누구나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들과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어 들어가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는데, 다시 찾았을 때 그 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시 찾아보고 싶다. 나이 서른으로 돌아가, 너와 함께.

네 눈을 통해서, 네 입술을 통해서, 네 머리칼을 통해서.

 

초등학교 오학년 때 별을 좋아하는 여선생이 담임이었다. 하루에 한두번은 꼭 꿈을 구는 눈으로 별 얘기를 했다. (중략)노래하는 것 같은 감미로운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별나라에 사는 나 같은 어린이는 무슨 놀이를 하며 놀까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 별나라들을 두루 돌고 싶다, 네 숨결을 타고.

열 살로 돌아가 네 부드러운 등에 업혀서.

 

강언덕에 위태롭게 앉은 집이 사공이 사는 오두막이었다. 다리를 저는 사공이 기우뚱대며 배를 미는 동안, 그의 딸은 이마를 덮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빈대떡을 부쳤다. 종일 그 집 툇마루에 앉아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강물을 구경하고 싶다는 내 생각은 한번도 이루어진 일이 없다.

그 툇마루에 가 앉아 있고 싶다, 네 등 뒤에 숨어.

네 가슴팍 사이에 숨어, 너로 해서 비로소 스무살이 되어.

             -‘네 머리칼을 통해서, 네 숨결을 타고

 

사랑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한 그애도 생각이 날 법도 하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찔레꽃은 피고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찔레꽃 향기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느 날 문득 찔레꽃 향기라도 맡게 되면 그애가 생각나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가 그애로 보이고 서울 뒷골목에서든 읍내 건어물집에서든 그애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걸 본다. 그렇게 찔레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세월을 따라 그애도 그리움과 추억 속에서 늙어간다.


세상을 따뜻하게
, 때로는 준엄하게

 

  늙는 일이 이처럼 그리움에 사무치는 일이기만 하다면 몸이 쇠약해져가듯 마음도 약해진 늙은이가 되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게 되듯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야 더 없이 넓고 넉넉해지기도 하며, 그만큼 사람답게 사는 일에 대해 단호하고 올곧게도 된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전문

 

  세상은 온갖 것들을 사이에 두고 다투고 경쟁하면서 이기고 지는 사람으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기고 성공한 사람에게 환호하고, 지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그 이유를 묻길 좋아한다. 시인은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그 편에 서서 함께 분노하고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쳤다. 그 일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행복했고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사는일로 여겼다. 지난날이 그러한데, 늙은 지금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을 담는 그릇은 그 그릇의 크기만큼만 물을 담아낸다. 그렇지 않으면 넘치기 마련이다. 그러면 담을 만큼만 물을 담거나, 그릇의 크기를 크게 하면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시인의 그릇은 아마도 세월이 흐를수록 담아야 할 물들이 많아져 보였을 거고, 그럴수록 그릇은 더 많은 물을 담아낼 만큼 커져갔을 거다. 그리고 끌어안아야 할 것들도, 사람들도 많아 보였을 거고.

 

백성이 낸 세금으로 오히려 나라가 나서서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고 있으니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는다는 옛 시구절은

이제 허사가 되었다.

불도저가 파헤치고 있는 것이

강바닥이 아니라 제 심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바위너설이 아니라 제 팔다리라는,

오랜 촌로들의 항의 따위 한낱

힘없는 넋두리로만 들리는 강마을은 서럽다.

         -‘옛 나루에 비가 온다

 

  온 국토가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고 상처 입을 때에도 시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인은 촌로가 되어 목소리를 높였을 거고, ()로 세상을 한탄하고 꾸짖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몸에 힘이 빠지기는 해도, 마음과 정신은 더 단단하고 굳세져야 하나 보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일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경험치로 매듭지어질 수도 있는 터이다.

 

담담해서 아름답게 흐르는 사람으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늙어가는 일은 살아가는 일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을 되돌이켜보거나 그리워하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더 이상 놓치지 않거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준엄하기까지 하거나.......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담담하고 아름답게먹어야 하지 않을까.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를 읽으면서 신경림 시인이 떠올랐다.

 

폭풍이 덤벼들어 뒤집어놓기도 하고

짐승들이 들이닥쳐 오물로 흐려놓기도 하는

강물이 어찌 늘 푸르기만 하랴

산자락에 막혀 수없는 세월 제자리를 맴돌고

매몰찬 둑에 뎅겅 허리를 잘리기도 하는

강물이 어찌 늘 도도하기만 하랴

제 속에 수많은 사연과 수많은 아픔과

수많은 눈물을 안고 흐르는 강물이 어찌 늘

이슬처럼 수정처럼 맑기만 하랴

그래도 강물은 흐르니 세상에

마실 것도 주고 먹을 것도 주면서

노래도 되고 얘기도 되면서

강물이 어찌 늘 고요하기만 하랴

자잘한 노여움과 하찮은 시새움에 휘말려

싸움과 죽음까지도 때로는 안고 흐르는

강물이 어찌 늘 넓기만 하랴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힘을 빌려다 마을과 들판을

눈물로 쓸어버리기도 하는 강물이

제 몸까지 내던지며 하늘과

땅을 한바탕 뒤집어놓는 강물이

어찌 늘 편하기만 하랴

 

강물이 어찌 유유하기만 하랴

강물이 어찌 도도하기만 하랴

그래도 강물은 흐르고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전문

 

  시인이 바라본 강물은 푸르기도, 도도하기도, 맑기도, 고요하기도, 넓기도, 편해 보이기도 한 강물이면서, 때론 어지럽기도, 불쌍하기도, 슬프기도, 시끌벅적하기도, 속 좁기도, 괴로워 보이기도 한 강물이다. 마치 세월과 역사가 그러하듯,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 역사는 흐르고 한 사람의 인생도 세월을 따라 흐른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담담한지 아름답기까지 하다. 세월과 역사가 그러하듯, 한 사람의 생애도 그렇게 담담하게 흘러내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까시인의 삶이 그러할 거라는 생각은 굳이 애써 생각해내려 하지 않아도 들게 된다. 그러면 나도 먼 훗날 나이가 들어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런 모습이라면 행복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2014.02.04 onmar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