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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팽이가 돈다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아이가 팽이를 돌린다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나의 일이며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모두 다 내던지고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바쁘지도 않으니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팽이..

메모노트 2013.05.09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김수영)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가로놓여 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

메모노트 2013.05.03

물 끓이기(정양)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메모노트 2013.05.03

눈물은 왜 짠가(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

메모노트 2013.04.30

너는 누구고

2 노란 색이면 개나리겠지 싶었다 처음엔 붉은 단풍나무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었다 봄 사진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붉은 건 단풍나무, 분홍빛은 진달래, 노란 건 개나리겠지 싶었다 그런데 ‘개나리가 아닌데, 개나리가 아닌데’ 실망하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은 없고 잎사귀가 노랗게 봄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란 건 개나리가 아니라…… ? 노란 건 개나리뿐인 내 머리는 두 눈보다 앞서지만 개나리 아닌 걸 개나리로 부를 만큼 아둔하고 성급하다 미안하구나, 네 이름을 꼭 불러주마 그걸 앞에 두고 한없이 작게 옹그리며 앉아 노란 그 무엇에게 약속을 한다 저편 학교 잔디밭 봄 햇살과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보며 나는 ‘너는 누구고, 너는 누구고’ 한다 _2013년 4월 25일

단상노트 2013.04.26

정일 선생

1 마징가가 불렀나 독수리 오형제가 불렀나 내가 놓아둔 시집 한 권*을 커다란 정일 선생이 집어든다 한쪽에서 창밖 봄 풍경에 젖어 졸고 있는 나는,찬찬히 들여다보다 정성스레 두 손으로 펼쳐든 시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순간 잠에서 깬다 마음을 들썩이며 아름답게 반짝이던 봄날의 풍경보다 시집 안에서 걸어나오는 마징가와 만나고 독수리 오형제와 만나는 그가 더 눈부신 순간이다 우주쇼보다 진귀한 장면이더라 경이로운 순간이더라 정일 선생이라서가 아니라 시가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그만이 가진 그 순간이 크고 아름답더라 * 정일 선생이 읽은 시집은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창비, 2005)이다.

단상노트 2013.04.2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원제 :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

메모노트 2013.04.17

도토리 두 알(박노해)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헨리 데이빗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에게서 따옴.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 교직원회의에서 ..

메모노트 2013.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