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onmaroo 2013. 6. 28. 09:47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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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시인은 나무는 그 자체로 나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나무는 ‘자기 온몸’을 다해 나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 또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자기 온몸으로’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할 때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되다’라는 말은 품사로 말하면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즉 어떤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거나 변하는 동작이고 과정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나무는 자기 온몸을 다해 나무가 되려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나’는 ‘아들’과 ‘남편’과 ‘아빠’로 불리고 ‘선생’으로 불리며 ‘이병관’과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데, 정말 ‘자기 온몸으로’ 그 이름의 존재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할 때가 있는가 봅니다. 나는 선생이지만 ‘선생’이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병관’답지 않은 것 같아 그렇게 되뇌나 봅니다.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이병관’답게 살고 싶고, ‘사람’답게 살고 싶으며, ‘선생’답게 살고 싶으며, ‘아빠’와 ‘남편’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저 나무처럼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살아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나 조건이 그렇지 않고, ‘현실’은 어떠하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그럴 만한 용기도 능력도 모자란 사람인데 하며 살아가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삶과 세상이 내가 믿고 바라보며 행복한 것이라면, ‘꽃피는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예전에 아내에게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행복할 거라고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추호의 후회도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후회는 하며 삽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면 좋겠다고 아내가 말한 것 같습니다. 나도 ‘꽃피는 나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살고 싶습니다. 자식으로, 남편과 아빠로, 선생으로, ‘이병관’이란 사람으로 ‘꽃피는 나무’로 후회하지 않도록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무엇을 위해 ‘꽃피는 나무’가 되려고 하는지도 늘 생각하며 살아야겠지요. 그리고 시인의 말대로 ‘자기 온몸으로’,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生)을 살다간 사람일까요.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2013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