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37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을 화두로 책을 읽고 있다. 팟캐스트 BUNKER 1 특강 중 강신주의 '일'을 듣다 언급된 책이어서 읽게 되었고. 먼저 첫 번째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역, 사회평론, 1997). '게으름' 자체를 예찬한다기보다는 '노동'(이 책에서는 '근로'라고 번역했는데 별로...)의 미덕을 비판하고 '여가'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깐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곧 노동의 미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루 4시간 정도의 노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여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노동'을 미덕으로 삼고 '게으름'을 비난하는 태도를 뒤집는 게 이 책의 내용인듯 싶다. 이 책은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이다. 23페이..

메모노트 2013.09.23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나무이다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나무는 자기..

메모노트 2013.06.28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지금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그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메모노트 2013.06.2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누구의 슬픔인가, 누구의 기쁨인가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메모노트 2013.06.07

가재미(문태준), 서해(이성복)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

메모노트 2013.05.22

생의 다른 생(백무산)

생의 다른 생 -백무산 싸락눈 소복 담긴 낡은 새둥지 하나 키 낮은 싸리나무 기둥에 간신히 달린 집 한 채 봄날 근사한 집 짓고 예쁜 짝 만나 가족 이루고 재잘재잘 한철 산다 찬바람 속으로 떠나보냈네 뿔뿔이 둥지마저 버리고 긴 겨울 골짜기 나무처럼 울다 다시 봄날 처음 날 듯이 날갯짓하네 새집 짓고 새짝도 만나 첫봄 맞듯 처음 살 듯 다시 산다네 새들은 몇 번의 생을 살다 가는 것일까 내게도 벌써 여러 봄과 여러 겨울이 지났네 지난 계절들 내 손으로 다 거두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나의 낯선 생이 바람 속 빈 둥지처럼 나뒹굴고 있네 나는 지나온 나의 전부가 아니네 내 온몸이 통과해왔건만 낯선 생이 불쑥 낯익은 바람에 타인의 것인 양 흩어지고 있네 나는 그걸 하나의 생이라고 우겨왔네 저기 다른 생이 또 ..

메모노트 2013.05.13

달나라의 장난(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팽이가 돈다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아이가 팽이를 돌린다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나의 일이며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모두 다 내던지고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바쁘지도 않으니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팽이..

메모노트 2013.05.09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김수영)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가로놓여 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

메모노트 2013.05.03

물 끓이기(정양)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메모노트 2013.05.03

눈물은 왜 짠가(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

메모노트 201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