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onmaroo 2013. 9. 23. 21:20

'게으름'을 화두로 책을 읽고 있다. 팟캐스트 BUNKER 1 특강 중 강신주의 '일'을 듣다 언급된 책이어서 읽게 되었고. 

먼저 첫 번째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역, 사회평론, 1997). 

'게으름' 자체를 예찬한다기보다는 '노동'(이 책에서는 '근로'라고 번역했는데 별로...)의 미덕을 비판하고 '여가'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깐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곧 노동의 미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루 4시간 정도의 노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여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노동'을 미덕으로 삼고 '게으름'을 비난하는 태도를 뒤집는 게 이 책의 내용인듯 싶다. 

 이 책은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이다. 23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글이니 금방 읽기는 한다. 그리고 책 내용 중 몇 몇을 발췌해 놓는다. 아무래도 내가 정리하기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 18쪽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19~20쪽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 20쪽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 21쪽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이를테면)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이 때 지각 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 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나고, 과저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결국 모두 4시간씩 일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만큼의 여가가 창출된 셈이다. 그러나 인력의 절반이 완전히 손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이보다 더 정신나간 짓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 22쪽

 

물품 생산에서 나온 가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 물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의해 획득된 이익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 29~30쪽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 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 30쪽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 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 32~33쪽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33쪽


 '일 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이 표현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 것을 교훈한 말이라는데, 자칫 오독하면 '노동' 자체를 예찬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이 공산주의권에서 부르주아 자본계급을 겨냥한 것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지만, 이후 노동을 '의무'로 규정하면서 러셀이 지적하는 일련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러셀은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사회가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여가가 생산되어 이를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을 미덕과 의무로 여기면서 과잉노동과 함께 불평등을 계속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 30쪽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학교'에서 풍요롭고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여가'를 활용하고 이를 통해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노동', 그것도 과잉노동을 하는 체제로 편입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 잘 놀면서 잘 사는 방법 같은 것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두 번째 책으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 조형준 역, 새물결, 2013)를 이어 읽는다. 이 책은 1880년 쓰인 글인데, 좀 과격한 표현이 많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