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물 끓이기(정양)

onmaroo 2013. 5. 3. 09:54

물 끓이기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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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낼 일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낼 만한 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지내는 일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면 나는 조금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가끔씩 화를 내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화낼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섯 살이 된 어린 아들은 이제 자기 감정에 충실합니다. 더 놀고 싶은데 치카치카 하자며 욕실에서 부르는 내 소리에 짜증을 내며 왜 부르냐고 대답합니다.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는 밤, 거실에서 뛰어노는 아들에게 뛰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뛰어다닙니다. 그런 아들에게 나는 예전보다 더 쉽게 화를 냅니다. 두 아이를 돌보느라 설거지가 잔뜩 밀려 있는 걸 보며 고무장갑을 끼면서 나는 아내가 들으라고 짜증 섞인 혼잣말을 합니다. 창턱에 지저분하게 올려놓은 물건들을 보면서 반 아이들을 몽땅 혼을 냅니다. 동아리 후배들과 만나 종례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을 불러다 혼을 내고 혼을 내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몰래 탄 아이들을 잡으러 계단을 뛰어올라 복도 끝으로 달아나는 아이들의 꽁무니를 무섭게 뒤쫓는 내가 왜 엘리베이터를 탔는지를 묻기도 전에 화부터 냅니다.

  그리고 신문으로 잡지로 인터넷으로 정치, 사회, 경제면의 신문 기사를 읽으며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노 하며 신문을 접고 잡지를 덮고 인터넷 창을 닫으며 커피나 한 잔 마시러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용산 참사가 ‘참사’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고등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사건을 ‘사건’으로 확인하고, 정치인이 누드 사진을 보는 사진을 ‘사진’으로 확인하고 커피나 한 잔 마시러 자리를 일어납니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가르치지 않고 ‘분노’를 가르치지 않고, 시상전개방식과 시의 주제나 심상을 가르치며 정답을 찾아줍니다. 그런 내가 이 시를 읽고 나니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분노’할 줄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 없습니다.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언제 했던가 싶습니다. 화를 낼 줄 모르고 사는 삶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어린 아들에게 화를 내고, 어린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의 마지막 연

 

  부끄러워할 일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분노할 만한 일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사람다운 조건이겠죠. 항상 평온하고 너그럽고 용서하는 것만이 옳은 일은 아닐 겁니다. 때론 ‘열받고’ 때론 ‘끝까지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스스로 당당하다면 열 받아 해야 하고 끓어올라야 할 테지요. 큰 일에 분노하고 작은 일에 너그러운 것보다 작은 일에 분노하고 큰 일에 너그러운 것이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크고 작음이 내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칠 만한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집에 가거든 어린 아들을 혼내기 전에, 끓고 있는 주전자의 물이 있거든 그걸 잠깐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도 떠오르고 김수영 시인의 시도 떠오를 테니 잠깐 숨을 고르고 살아야겠습니다. 

2013년 5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