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도토리 두 알(박노해)

onmaroo 2013. 4. 17. 15:42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헨리 데이빗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에게서 따옴.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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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직원회의에서 목사님께서 읽어주신 시다. 듣고 나서 메모지에 시 제목과 시인의 이름을 적어놓고 나중에 다시 찾아 읽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교사로서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마음으로 다짐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낮추어 보려는 경향이 있다. 성적이든 외모이든 친구관계든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며 지낼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자존감보다는 자기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게 어찌 아이들만 그러할까. 어른인 우리도 그러면서 살아가는 걸 보면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모두가 ‘너는 어떻고 나는 어떻고’ 식의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자라나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씨앗인 도토리의 모습만을 비교하며 ‘크고 윤나는 도토리’만 골라내어 주워 담으려고 한다. 우리가 그렇고, 세상이 그렇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참나무가 되리라는 사실을 금세 잊은 듯이 말이다.

  밭에 씨앗을 심을 때나 씨감자를 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종자와 씨앗을 골라 심어야 결실도 좋지 않을까. 그게 당연한 거지. 그러면 사람도 그러한가.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은 농사지을 때 쓰는 종자나 씨앗처럼 여기면 안 될 것만 같다. 좋은 종자와 씨앗을 골라 심는 것은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 그럴 때 씨앗은 이미 씨앗을 뿌린 사람을 위해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목적이 정해진 거지. 하지만 이것도 사람이 농사지을 때나 그렇지 저 산에서 스스로 자라는 나무나 풀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저절로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그것이 보잘것없건 윤기가 나는 것이건 뿌려진 대로 자라고 살아간다. 그리고 산의 한 자리에서 나름의 몫을 하며 산을 이룬다.

  하지만 사람이야 어찌 그럴 수만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가 애초에 목적이 정해져 있다면 사람은 태어나는 대로 그 목적에 따른 기준에 맞게 분류되어 선택되겠지만, 어디 사람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을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사르트르가 한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 아닐까. 결국 사람이란 자기 자신의 의미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구성하는 존재라는 뜻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크고 윤나는 도토리’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가 내 손바닥 위에 놓여있으면, 이래야 하겠지. 내가 참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골라 내어 버려야 한다. 내가 자연이라면(물론 가정이지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이 산길가에 그대로 두면 된다. 내가 사람이고 ‘도토리’도 사람으로 여긴다면(시에서 말하는 도토리가 그러해야 시가 되겠지만), 둘 다 주워들어 빈숲으로 던져주며 참나무가 꼭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할 터이다. 그리고 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에게는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라고 꼭 말해주어야 할 것이고.

  아이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생긴 것도 제각각, 성격도 제각각, 그리고 성적도 제각각. 교사인 나에게도 현실은 이 아이들을 분류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 내가 애써 나누고 싶지 않아 해도 입시 상담을 하면서 성적으로 나누고 대학교로 나누게 만든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서로 자신이 더 크고 윤나는 ‘도토리’라고 필사적으로 경쟁하려하지 말고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키우라고 말을 해도 가시지 않는 그 무언가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게 마치 아이들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렇다고 선생으로 할 일이야 없지는 않겠지. 내가 할 일을 생각해본다.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도록 이끌 것. 그리고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기를 꿈꿀 수 있도록 할 것.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도토리’들을 숲으로 힘껏 던져줄 것. 그리고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라고 말해줄 것.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아이, 진서와 연우에게도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짐하는데, 내가 가르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3년 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