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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백석)

onmaroo 2013. 4. 17. 15:45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원제 :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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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나는 눈과 가슴이 뜨거워진단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인 양 눈으로 정성스럽게 주워 담게 된단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백석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는데, 나 역시 백석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삶이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끔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삶’이지만 ‘나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삶은 내가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삶의 무게를 버티기엔 내 두 다리가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야.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너희들도 지금 원하건 원하지 않건 입시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이 벽을 어찌 넘을 수 있을까 답답하고 힘겹고 막막해서 모든 걸 팽개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들 때가 있겠지. 아무리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 현실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도 들겠지.

  시인도 그런 것 같아. 우리와 다른 이유에서 그렇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서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만 항상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느낄 수밖에 없어 하고 있어. 심지어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절망 그 자체였겠지.

  그런데 사람은 말이지,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단다. ‘내가 이러려고 사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고 자신의 의지로는 해결이 안 될 것만 같다면,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도 없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럴 때 운명이나 신(神)과 같은 존재를 떠올리게 돼. 그 순간이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이지.

  그런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삶도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간단다. 그리고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마음을 바꾸는 거야. 눈앞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의 눈을 바꾸는 거지. 그리고 사람은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운명에, 신의 뜻에 따라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깐. 물론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 있는 ‘갈매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슬프고 힘들고 외로운, 처지가 같은 갈매나무를. 하지만 갈매나무에게 ‘굳고 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지. 추운 겨울, 외롭게 서 있는 갈매나무는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도 굳건하고 정결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나’는 어떻지? ‘나’ 역시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데. 그런데 갈매나무는 ‘굳고 정한’ 모습으로 자기 자리에 서 있지. ‘나’는 어떻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얘들아! 누구나 다 슬프고 외롭고 힘들 수 있다는 말만으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잘 안단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누구나 참고 견디며 살아간다는 말만으로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삶은 항상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런 삶에 누구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기억하렴. 그리고 그 삶은 어찌되었건 ‘나’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도 꼭 기억하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다고 해서 내 삶에 책임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이 내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그게 ‘나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내 환경과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삶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라도 굳건하게 붙들어야 한다. 그건 '나의 삶‘이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거니깐.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나에게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존경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누군가이기도 하고, 시멘트 틈 사이로 꽃을 피운 민들레가 될 수도 있고, 내가 품고 있는 꿈일 수도, 내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고.....

  그러니 힘들고 지칠 때, 슬픔과 어리석음으로 한 없이 괴로워할 때 ‘나’의 눈을 들게 하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삶’을 데리고 다시 인생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하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나’에게 있는지, 잘 생각해보렴.

  어쩌면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나’ 자신이 언제인가 스스로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2013년 4월 16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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