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어른들의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 - 영화 '도가니'를 보고

onmaroo 2011. 10. 21. 21:07

 어제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무거운' 피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내년 2월에 태어날 둘째를 검진받고 첫째 아이는 처형댁에 맡기고 아내와 함께 영화 '도가니'를 보았다. 먹먹한 가슴과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눈물을 영화보는 내내 견디기 힘들었다. '무거운 피로'는 벗어야 할 것도, 쉽게 벗을 수도 없는 것 같다.

  영화 '도가니'는 광주의 청각장애학교인 인화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청각장애 아동 성추행 및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나서도, 지금까지도 가슴이 먹먹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기사 글들을 살펴보면서도 가슴 속은 뜨겁고 눈물은 계속 난다. 슬퍼서가 아니라 '어른들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 것 같다.

  임신 중인 아내가 이 영화를 보는 게 걱정이었지만, 영화를 잘 봤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아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린 좋은 어른이 되자.'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

공지영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신문기사에서 본 이 한 문장때문이었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이 사건과 관련한 당시 광주 인화학교 교장은 항소심에서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행정실장은 집행유예 10개월, 관련 교사 1명은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감옥이 아닌 세상으로 유유히 걸어나가고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 사람들만큼이나 그렇게 결론짓고 마는 '어른들'과 '어른들의 세상'을 경멸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가족들과의 합의로 자신들의 죗값을 저울질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에서 '어른들의 세상'이 어떤지를 본다.

  영화 속 피해자로 나오는 '민수'가 '연두'만큼 법정에서 잘 증언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지만, 선생인 '인호'에게서 합의로 인해 증언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울부짖는 장면은 잊혀지질 않는다.

"내가 용서 안했는데, 누가 용서했다고 그래요? 나랑 동생 앞에 와서 무릎꿇고 빌지도 않았는데... 누가요 누가!"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 서유진이 하는 말이었던가.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어른들의 세상'에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또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까. 아내가 내게 그랬듯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거짓된 세상에 흔들리지도 불의한 세상처럼 변하지도 말아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눈물은 교장과 행정실장과 가해 교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판사, 검사, 형사, 교무실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앉아 있는 다른 교사들이 모두 가해자이듯, 교장과 행정실장과 관련 교사가 버젓이 법원을 걸어나와 자기들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가해자가 된다.

가슴이 먹먹하다. 눈시울도 뜨겁다. 아내는 둘째를 품고 있다. 우리 곁에는 아이들이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품어야 할 아이들이 많다.

그 아이들이 바라보고 느끼고 기억할 '어른들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 그때까지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아내가 자신의 배에 손을 얹고 말했듯이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2011년 10월 14일

[덧붙이는 말]

지난 3일 이명박 대통령이 영화 '도가니'를 보고 한 말이다.

'이런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법적,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의식 개혁이 더욱 절실하다.'

'의식개혁을 위해선 사회 전반의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사회적 약자에)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묻고 싶다. 왜 이 상황에서 '자기희생'이 요구되는지를.

묻고 싶다. 왜 이 상황에서 '법적 제도적 보완'보다 '의식개혁'이 더 절실한 것인지를. 그것도 '전반적인'...

묻고 싶다. 소설과 영화 '도가니'에서 다룬 사건이 왜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지를.

※ 아래는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사건과 영화 '도가니' 관련 글.

 

공지영 “양심의 법정에 사법부 세우고 싶다”http://goo.gl/kA8MT

“무죄판결 받았다. 나는 떳떳하다" http://goo.gl/KUh5X

대책위 대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끔찍”http://goo.gl/E8J52

“성폭력 관대한 형량 잘 알지만 집행유예 선고에 치가 떨렸다”http://goo.gl/WZdZ5

공지영 “잔인한 성폭행 묘사, 꼭 필요했다”http://goo.gl/WiXW7

‘도가니’ 인화학교 법인허가 취소·시설 폐쇄http://goo.gl/bPVap

‘도가니’ 판사 “피해 학생들의 아픔에 공감한다”http://goo.gl/6g9RS  ('인화학교' 사건일지 포함)

'성폭행 저항 불능', 그걸 장애인이 증명하라?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38162

나경원 “알몸 목욕, 더 언급하고 싶지 않다”http://goo.gl/oK7vV

‘도가니’ 본 MB, 엉뚱하게도 “의식개혁이 더 절실”http://goo.gl/ZfF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