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호모 페이션스로 살아가기

onmaroo 2016. 10. 7. 20:00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고민하는 인간)로 살아가기




아이들 상담을 하다보면 고민의 구체적인 내용이야 다들 다르지만, 이것만큼은 같다. 


'고민을 한다'라는 사실과 '답이 없다'는 답답함. 


 시험은 당장 다음 주에 있는데 잘 볼 것 같지 않은 불안감. 

 열심히는 하는데 소기의 성과는 안 나오는 허탈감. 

 도대체 내 공부 방법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답답함. 

 만약 앞으로 잘 하지 못하면 내가 목표로 한 대학은 물 건너갈 거라는 두려움. 

 그러면서도 내가 정말 좋아하고 원하는 진로나 이루고 싶은 꿈을 정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불안감. 

 그런데도 열심히만 공부하는 게 맞는지 확신은 못하겠고, 해야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고민을 하더라도 불안감과 답답함은 커져만 간다. 기운이 나질 않는다. 책꽂이에 꽂힌 '공부가 이토록 재미있어지는 순간'이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의 저자처럼 신이 날 턱이 눈곱만큼도 없다. 공부가 신이 나고 쉬워서 서울대에 간 게 아니라 서울대에 가고 보니 공부가 신난 것 같아 보이고 쉬워 보인 거다. 성적과 학업열의가 신나게 맞물려 도는 학생이 아닌 이상 그 둘이 맞물려도 삐걱댈 뿐 돌지가 않는다.  그래도 고민은 한다. 하지만 그 고민을 밀고 나갈 힘이 없다. 들어갈수록 어둡기만한 터널 같다.


 정작 고민거리를 털어놓게 해도 교사인 나 역시 당장 해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미안하고 답답하다. 상담이 끝나고 돌아서서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뭔가 감화를 받은 것 같지 않을 때(가끔 나는 상담을 하면서 감화를 내려주려고 안달난 사람처럼 군다.), 더 미안하고 교사로서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감화 정도를 받고 간다한들 그게 아이들 고민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가 독서실 자리에 앉아도 크게 또는 당장 달라진 것은 없다는 걸 깨달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고민은 지속된다. 고민은 하면 할수록 깊어진다. 너도 나도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강상중 교수의 책 <고민하는 힘>과 <살아야 하는 이유>(사계절)를 다시 들쳐보았다. 


 강제수용소를 체험한 것으로도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터 E. 프랭클은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인간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민하는 힘> 5)


 '호모 파티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인간)를 비튼 말인데, 이 말에는 살아 있는 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인간성의 위계에서 볼 때 더 높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 55)


 (책을 뒤적거리다 책의 저자와 내가 머리 속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강상중 교수와 어느새 대화를 하고 있는 나.


'고민하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인간다움'의 증거라고 말씀해주셔서 위안이 되네요. 하지만 고민을 하는 건 결국 해답을 얻기 위한 일인데, 고민은 하면 할수록 해답은 커녕 고민 자체가 눈덩이처럼 커져가니 그게 문제에요.  


 아이들은 한번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독서실 자리에 앉아 줄기차게 공부하면서, '정작 대학은 갈 수 있을까', '가고 싶은 대학은 있지만 가고 싶은 과가 없다', '친구들은 별과 같은 자기 꿈을 포스트잇에 써붙여 놓고 공부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공부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지? 이유도 목적도 없으면서...'


 고민은 대체로 질문의 형태를 띱니다. '왜 해야하지?', '뭘 해야하지?', '정말 할 수 있을까?', '어쩌지?' 식으로 말이죠. 그건 답을 찾는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공부는 왜 해야하지?라는 고민을 계속하면 질문만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좀처럼 해답이라는 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고민 자체를 더 하고 싶지 않게 되죠. 그러다보니 제자리를 맴도는 고민쟁이가 되느니, 이걸 피한 채 딴 짓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이내 공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 고민을 마주하게 되죠. 계속 그런 식이에요. 맴돌기를 멈추게 할 '해답'이 필요한데 그게 보이질 않아요.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민하는 힘> 85)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해답 없는 물음으로 고민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제 나이보다 성숙한 '청춘'이 되는 건가요? 그런 문제를 또 제가 고민하고 있으면 나이 마흔이 '청춘'이 되는 거구요?

 

 그래도 역시 조급해집니다. 고민을 한들 해답이 보이지 않는 걸요. 상담을 하며 해답을 아이랑 나랑 머리를 맞대고 그 짧은 1시간동안 하려고 달려들어도 서로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힘듭니다. 막막합니다. 답답합니다.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92)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한번 가보는 거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 해보는 거다. 그게 고민을 밀고 나가다 얻게 된 해답(?)이다', 이건 가요? 왠지 그럴 듯하면서도 좀 기운 빠지는 말 같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고민의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으며, 고민의 해답을 얻고 싶다는 열망으로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 보라는 거구요. 아니면 해답은 없으니 고민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해야할 일이나 하라는 거구요. 


 이래도 저래도 어쨌든 해답을 당장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고,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부터 최선을 다해라. 이런 거군요. 그래도 여전히 허전합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힘껏 달려보자, 할 수 있는 것부터 최선을 다해 해보자'라고 하더라도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해 죽겠는데 그게 되나요? 이렇게 열심히 해보면 내 미래가 달라질까요?


 그렇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하며 살아서 좋은 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살아야 하는 이유> 168)


 '현재에 충실해라, 그건 좋은 과거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인가요? 멋지고 성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과거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소극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쪽으로만 시선을 향하고 마는 것인데, 인간에게 정말 귀중한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아닐까요.(168)


 왜 그렇죠. 모두가 성공한 미래를 위해 현재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못된 건가요? 


 과거의 축적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이에 비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제로 상태입니다. 미래는 어디까지나 아직 없는 것이고 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인생'이란 '내 과거'이니, '나는 과거로소이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169)


 그러니깐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미래에 내 인생과 현재의 노력을 거는 건 도박 같은 것이다. 나의 인생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고 다가올지도 말지도 모르는 미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확정적이고 확실한 사실이 되는 과거이라는 거죠. 그리고 미래란 것이 불확실성을 근거로 한 것이니 당연히 미래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불안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차라리 자기 인생을 구성하는 가장 확실한 '과거'를 좋게 만들기 위해 현재의 시간과 노력을 던져라는 건가요?


 과거를 중요시하는 것은 인생을 중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역으로 '가능성'이라든가 '꿈'이라는 말만 연발하며 미래만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에 무책임한, 또는 그저 불안을 뒤로 미루기만 할 뿐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169)


 그러면 '전 꿈이 없어요. 그래서 너무 고민이 되고 막막해요.'라는 고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겠네요.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것을 두고 이를 확신할 수 없다고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니깐요. 그러니 꿈이 없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구요. 미래에 대한 불안, 막막함은 당연한 것이지 심각한 문제상태라고 볼 수 없겠구요. 


 -고민을 하는 인간은 그 자체로 인간다운 존재이다. 

 -고민은 해답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이지만, 해답은 당장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민은 하되, 현재 자신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는 거다. 

 -그리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일은 미래가 아닌 '좋은 과거'를 만들기 위한 일이다. 


 그렇다면 고민에 휩싸이면서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그 순간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한 순간 한 순간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180)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 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도 괜찮다는 것. 지금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도,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되어도, 마침내 인생이 끝나는 1초 전까지 좋은 인생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별히 적극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특별히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어도, 지금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답다는 것. 그러니 녹초가 될 때까지 자신을 찾을 필요 같은 건 없다는 거. 그리고 마음이 명령하는 것을 담담하게 쌓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는 저절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이러한 '태도'가 아닐까요. (191)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새삼 중요해보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가 여전히 고민이 되네요. 당장 해답은 없겠죠? 그건 각자의 몫일 테니깐요. 


 마치며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남이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먼저 내가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노력해보는 일이 최선이다. 자신의 고민을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은 대나무 마디처럼 자라고 성장한다는 어느 졸업생의 말이 생각난다. 그래, 자기 고민을 마주하고 끌어안는 건 대나무 마디 하나를 갖는 거고, 그러면 어느새 마디와 마디 사이에 줄기가 크게 한 뼘씩 자라 있게 된다. 좀처럼 자랄 것 같지 않지만 그 마디와 같은 고민이 '나'를 성장시킨다. 

 내가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는 상담도 아이들이 마디 하나를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일테다. 그러니 나도 당장의 해답을 던져주지 못한다고 조급해하지 말자. '너'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 되고, '너'가 마디 하나를 갖게 되면 '나'도 마디 하나를 갖게 될 거다. 


  그렇게 우리는 '호모 페이션스'로 살아가면 된다. 


 문득 강상중 선생님과 다음에는 '공감'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고민과 마주하는 일이 각자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너의 고민이고 문제이니 너가 알아서 해라'는 아니지 않은가. 호모 페이션스로 살아간다는 건 각자 외로운 섬으로만 살아가는 일이 아니다. 호모 페이션스들은 이미 서로를 위해 언제든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고민을 해 본 사람만이 고민하는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깐 말이다. 그러니 '고민'과 '공감'은 이미 한 짝이다.  


 호모 페이션스로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