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교사로서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onmaroo 2015. 6. 1. 23:14

1.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하던 중, '교육 불가능성'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다. '교육 불가능성'은 이계삼 선생이 한 말인데,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한 아이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선생님, 희망은 있어요. 그건 선생님이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아차, 내 말이 오해를 낳았다.
먼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설명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희망이 없다거나 무기력함과 체념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아마 이 말이 생각이 났더라면 더 좋았을걸.
"희망은 그 폐허에 대한 응시에서 나온다."(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중)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읽은 책에서 언급된 것이라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 잘못이다. 또한 내가 그 취지는 이해하지만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미리 덧붙이지 못한 것도 잘못이다. 또한 그렇다면 그것을 그런 식으로 화두로 던진 것도 잘못이다.

2.
'교육'의 문제나 위기를 이야기할 때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는 비판의 주체가 되면서도 비판의 대상이라는 인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진다.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말할 때, 교사나 학생이나 그것을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보고 있다고, 위기라지만 희망을 이야기할 용기를 버린 건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면 너무 무기력해지고 뭣도 아닌 느낌에 맥이 빠진다.

3.
문득 학교 안에서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두려운 일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다, 그런다고 당장 해결될까, 그런 말을 누가 못해서 안 하냐, 잘난 척하는 걸로 비춰지면 어쩌지, 희망은 있지만 현실은 덮어두자...등등.
그 아이 말대로 '용기'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 안에서 이 안의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용기가 말이다.

4.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를 읽고 있다. 예전에 읽다가 덮어두었지만,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교사도, 아이들도 함께 읽으면 어떨까 싶어진다. 나는 학교에서 교사로 살아간다. 교사인 나의 고민들을 아이들에게도 친구처럼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5.06.01.
#교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