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하루를 같이 살아가기

onmaroo 2015. 6. 10. 11:38


1.
수요일 아침인데도 교무실이 조용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수요일 1교시가 공강인 경우가 많아 수요일 아침이면 늘 교무실 수돗가가 북적였는데 말이다.
혼자 조용히 커피를 내리다 어느 한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무슨 문제나 고민 때문인지 얼굴이 어둡다. 이유는 묻지 않고 있다. 때로는 그게 배려가 될 수 있기에.
내린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말없이 건넸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

2.
사람들은 큰 일을 겪고 있을 때 어제와 같은 일상을 지속하기 어렵다. 너무나 절박하고 슬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절박함과 슬픔 부족'과 같은 자책감 또는 죄책감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모질기만 한 사람들은 그런 줄도 모른 채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니?"
"지금 그렇게 웃고 있을 때야?"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부모에게 건넨 아이가 잠깐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거실 한쪽 식탁에 앉아 그 성적표를 믿기 힘든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던 아빠나 엄마나 아이에게 모질게 말한다.
"이러고도 TV가 눈에 들어오니?"
밥을 먹고 있는 아이에게 모질게 말한다.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냐?"
성적표를 받은 날 울었던 아이가 다음날 친구들과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그런다. 어떤 모진 아이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성적표 받고 울던 애가 그러고도 저렇게 웃음이 나나?"
그걸 본 모진 선생 하나가 또 말한다.
"넌 그러고도 웃고 떠들 기운이 있냐? 절박함이 없어."

너무 비약이 심하거나 극단적인 상황 설정인가? 만약에 드라마를 만든다면 이런 설정 정도가 있어야 주제랄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테다. 그냥 가정이고 상황 설정이라고 해두자.
모진 사람들의 이런 말들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인 아이의 마음 속에는 자기검열처럼 그런 시선과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거다. 당연하고 당연한 마음이다. 잘못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모질게 대하는 것도 슬픔이나 절박함 때문이고,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일. 그게 때로는 그제, 어제와 같은 일상적인 일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 모진 상황이라면, '타인의 시선'을 타인이 말과 표정으로 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상처는, 고통은 그렇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3.
다시 돌아가서, 아까 그 선생님에게 말없이 커피를 건넸다. 수요일 아침이면 커피를 직접 내려 사람들과 나눠 드시면서 즐거워하던 모습은 오늘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지금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는 일, 그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하기에는 슬픔이 크고, '그럴 여유를 부릴 때인가'라는 자책감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일까. 내가 말없이 건넨 커피를 받아든 손이 떨리고 가슴이 울컥해서 눈물을 흘리던 것도 그래서일까. 스스로를 그렇게 옭죄고 있던 것이 잠깐이지만 풀려서 그런 걸까.
잘못은 아니나 스스로를 옭죄고 있는 것도 '타인의 시선'이고 그것을 풀어줄 것도 '타인의 시선'이다. 아이를 바라보며 건네는 "그러고도 TV가 눈에 들어오냐."와, 어제도 그랬듯 "TV, 같이 보자."는 모두 아이 바깥의 사람에게서 온 말이며 시선이다. 하나는 옭죄고 하나는 푼다. '일상'이 하나는 비난의 이유가 되고 하나는 공감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바깥의 사람, 타인으로 어떻게 하는 게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일까? 답이 너무 당연하고 뻔하다. 당연하고 뻔한 걸 하지 못하는 게 또 사람이다. 일상을 지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그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게 옭죔을 풀어주는 일.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만큼이나 중요하고 사람답게 사는 일인 것 같다.

문태준의 <가재미>라는 시가 다시 읽힌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