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교사에게도 친구가 필요해.

onmaroo 2015. 6. 5. 19:37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2013)를 읽었다.



책을 읽고 나면 머리에, 가슴에 남겨두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기억력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글로 남겨야 '남는다'.

1.
이 책은 현재 우리의 교육현실을 '폐허'로 바라보고 있다. 책의 시작부터 교사로서도 그저 씁쓸하면서도 충격적이다. '학교 붕괴', '교육의 위기' 등은 많이 보았지만, '폐허'라는 단어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교사인 내가 설 자리를 부정하는 느낌마저 들어서였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희망을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희망은 그 폐허에 대한 응시에서 나온다. 나는 그 폐허를 같이 응시하며 희망을 만들고자 하는 분들과 이 책을 같이 읽고 싶다." ('책을 내며' 중)

다행인지 머리말에 이 구절이 나왔을 때 안도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냉정하고 철저하게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응시하고 이야기하는 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의 위기를 진단하기에 앞서 '학교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 기대는 가능한 것인지, 혹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19쪽)는 말은 내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학교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어떤 교사의 모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누가 나에게 이 질문들을 쏟아낸다면 나는 당장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조차 안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학교에 머무르고 있단 말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내게 굵직하고 중요한 질문부터 던지고 있었다.

2.
이 책은 '교육적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학교 현실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장 교사들의 인터뷰가 많이 인용되고 있고 실제 학교 현장의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어 많은 부분 공감을 산다. 물론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학교와 교육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는 이해하지만 그것을 '폐허'나 '불가능'으로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학교에서 교육적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상황을 교육 당사자인 '교사'가 스스로 문제삼고 진단하는 일이 불편한 걸까? 아니면 '폐허', '불가능' 등의 용어 사용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자꾸 걸리는 걸까?

먼저 교사로서, 교사의 삶이 어떤지를 이야기하는 상황을 떠올려본다. 주로 우리는 교사의 삶에 대해 '~해야 한다'는 당위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는 교사가 가져야 할 책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반면 학생이나 학부모에 대해서는 당위의 언어보다는 '~하고 있다'는 진술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는 학생을 볼모로 붙잡고 있는 사람으로 비쳐져서일까? 아니면 학생이나 학부모는 학교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로만 바라보는 시각 때문일까? 아니면 '교사'란 사회의 '어른'이고 누구보다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감 있어야 할 주체이기 때문일까? 이렇든 저렇든 평등한 시각은 아니다.

일단 '교사'로만 생각을 좁혀보자. 교사로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고 고단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들은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들은 대부분 교사들이 보는 잡지, 신문, 책 등에서이다. 학생이나 학부모에게까지 읽힐 만한 매체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건 당위가 아닌 진술의 언어로 학교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교사'가 말하는 것이 마치 징징대는 것 같고 교사로서 사명감도 없는 것으로 비춰질까봐 그런 걸까? 아니면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읽히거나 들어주는 일이 일상적인 일로 자리잡지 못해서일까? 사실 이런 말들은 주로 교사들 안에서나 읽히거나 들리는 것들이지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까지 일상적인 이야기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이 서점의 인문사회 코너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게 마음에 든다. 교사에게만 국한된 담론이 되지 않을 최소한의 조건은 갖춘 채 세상에 던져졌으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나는 교보문고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책을 사버렸다. 그건 내가 교사이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교사니깐 이 책을 사서 읽겠지. 하지만 학생들이 이 책 제목에 흥미를 느껴 이 책을 들쳐볼까? 학부모는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된 책들은 보겠지만 교사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런 책을 들쳐볼까?

3.
교사로서 학교에서 살아가는 일이 사명감과 책임감과 당위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답답하고 힘들고 괴로우며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과 상황이 교사의 삶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까. 교사끼리도 하기 힘들더라도 기껏해야 교사끼리다. 아이들 앞에서 말하지도 못하고 학부모 앞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건 교사들이 솔직하지도 용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교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하고 싶어도 들어주려하는 사람이 없어서이다. 교사는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교사 자신에게도, 학생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모두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입장에서 교사의 고충과 슬픔과 고민을 '일상적'인 말로 들어줄 수 있는 '관계'가 우리 모두에게 없어서이다.

4.
'교육적 만남'에 대한 엄기호의 정의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 교사와 동료 교사 사이에 '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이라는 의미에서의 '교육적 만남'"(33쪽)

교사도 아이들만큼이나 진정한 의미에서 성장하고 거듭나고 싶어한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다짐과 설렘을 교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사들 역시 현실의 장벽 앞에서 힘들어하고 무디어가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교육이라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교사와 학생으로 1:1 대응의 짝을 이루는 것만은 아니다. 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수업과 생활을 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존재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때로는 친구처럼 징징댈 수도 있고 힘들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들어주어야 한다. 동료교사만이 그 '누군가'는 아니다.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학교의 평등한 주체라면 말이다.

누구의 탓을 하고 싶진 않다. 그러기에는 학교에서 '교육적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가 너무 크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 갇혀 살고 있다. 그 안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만이 그 안의 문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볼 수 있다. '교사'인 나가 아니라 교사인 '나'로 아이들에게 친구처럼 말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 그러러면 내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강박관념이나 두려움이나 권위마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이들과 '대화'와 '만남'을 교실 안에서 나누고 싶어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들끼리도 이런 이야기를 좀더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은 동료 교사들끼리도, 아이들과 함께도, 학부모와도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그건 학교에서 함께 꿈꾸는 희망을 보려고 하는 일이지, 마냥 징징대고 싶은 일이나 마음은 아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결론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대화가 아닌 이런 대화'가 우정의 대화이며, 우정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에 대한 이런 대화로 구축'된다."(319쪽)

대화가 필요해. 친구가 필요해.

2015.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