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노트

과자 봉지 뜯어줄까?

onmaroo 2014. 4. 16. 13:36


저녁시간 아이들이 교정에서 왁자지껄 놀고 있는 걸 보러 중앙계단으로 나오니 대학에 다니고 있는 졸업생 하나가 서 있었다. 대화는 거기서 시작됐다. 대학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은 걸 해보고 있는데, 딱히 자기가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나 공부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고, 그래서 어떤 일에 푹 빠져 공부하고 경험하며 지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나도 그때쯤 했었던 고민인데, 딱히 만족할 만한 답을 해주진 못했다. 그냥 아이들과 상담하면서 늘 하는 말로, 아직 그걸 확실히 정할 수 있을 만한 나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을 잔뜩 펼쳐보고 고민하는 나이라고만 말했던 것 같다. 언젠가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될 때가 있을 거고, 그때 주저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리고 책 많이 읽으라고.
 
참 궁색했다. 사실 나도 그 고민은 여전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 더 그랬다. 그래서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는 내가 요즘에 하는 생각을 진지한 말투로 전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얼 하고 싶다면 너무 거창한 계획보다는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라.’ 좀더 진지하게 더 많은 말을 하려던 차에, 그때 우리학교 한 학생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고 대화는 잠깐 멈췄다.  작은 과자 봉지 하나를 내밀기에 내게 주는 선물인가 싶었는데, 그걸 뜯어달란다. 그냥 찢으려니깐 자기는 찢는 건 싫고 뜯어서 벌려달라고 했다. 
 
“왜?!” 
“그래야 맛있으니깐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이것 하나 뜯지 못하는 남자 어른이 될 수는 없어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뜯어서 봉지를 벌려주니 아이도 좋아라했고 나도 이 사소한 일에 내심 뿌듯해했다. 나도 힘 있는 남자 어른인 것처럼 말이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고 싶으면 언제나 여자 어른이 아닌 남자 어른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졸업생과의 대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대화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고민을 들어주긴 했는데, 딱히 답을 들려주진 못해서 그랬나보다. 책상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메신저로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서 보냈다. 그리고 답이 왔다. 
 
 나 : 생각해보니 오늘 니가 한 물음에 나도 참 궁색한 사람인 듯 싶더라. 근데 누굴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내 자신의 삶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더라. 크게 숨 한번 쉬고, 나를 위해 무얼 할지부터 차근차근 고민하며 살아가면 니가 한 질문에 대한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졸업생 : 나를 위해서... 무엇 하나 쉬운 고민은 없지만 그래도 나아가는 발판이 되겠죠? 근데 대답은 꼭 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오늘 선생님이 대답하시면서 교정에 있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답이 어느 정도 되고 있었어요. 

 아이가 과자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과자 봉지 찢지 않고 뜯어 벌려준 일이 대답이 되었다면 나도 그걸로 족하다. 
201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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