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자발적 복종'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같이 읽기

onmaroo 2013. 11. 1. 15:15

<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박설호 역, 울력, 2009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지젝 인터뷰>, 인디고 연구소, 궁리, 2013
 

정말로 기이하지 않은가? 

라 보에티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놀라운 것은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이다. 실제로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기이하지 않는가? 15


 
흔히 폭정이나 불합리한 권력에 대해 우리는 분노한다. 그러한 분노는 당연하듯 그 일을 하는 독재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문제의 본질인가?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98-99/<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지젝과의 인터뷰, 인디고 연구소, 2013


 
라 보에티는 문제의 본질은 독재자에게 있지 않고 인민의 노예근성 또는 자발적 복종에 있다고 보고 있다. 
 

폭군을 살펴보라. 폭군은 마치 하나의 불꽃과 같다. 그는 자그마한 불티에서 발생하여, 점점 커진다. 사람들이 땔감을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불은 더욱더 많은 것을 태워 삼키며, 강대해진다. 만약 불 주위에 더 이상 탈 것이 없다면, 화염은 조만간 꺼져서 사멸해 버릴 것이다. 그래, 사람들이 폭정이라는 불길에 물을 끼얹을 필요조차 없다. 오로지 불 스스로 타들어가도록 신경 쓰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25

 
 
자발적 복종과 자유에 대한 망각

 그러면 왜 인민들은 자발적 복종을 하게 되는 걸까? 애초에 노예근성이 있다면 자발적 복종은 불변의 성질을 가진 것이고,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닌가?

라 보에티는 독재자의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인민들의 자발적 복종은 자유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한다고 보고 있다. 라 보에티는 먼저 자유는 인간이 자연에게서 부여받은 고결한 선이라고 말한다.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26
 
우리는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적으로, 천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36

 
 
이 글 곳곳에서는 천부적인 자연권으로서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명시하고 있는데, “1: 인간의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가 그것이다. 라 보에티의 이 글이 154818세의 나이에 쓰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사상은 선구적이기까지 하다. 
 

(윤리의 정치화) 우리는 단순히 을 향한 의무를 다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37/<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지젝은 윤리의 정치화를 강조하면서 인류 공동이 추구해야 할 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라 보에티는 18살의 나이에 그 답을 하고 있다.

라 보에티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의식의 상실 또는 자유에 대한 망각이 자발적 복종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본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인민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자유를 너무나 뜻밖에, 갑작스럽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자유를 되찾으려는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46
 
자고로 인간은 여태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무엇 때문에 한탄하지 않는 법이다
. 55

 
 
폭군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인민들은 자유라는 천부적인 권리를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무엇이기에 잃어버렸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에게는 자발적 복종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군주의 술책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6. 군주의 술책부분이다. 군주는 끊임없이 인민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그래야 인민은 자신에게 자유가 원래부터 주어졌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노예로서 순종하는 삶이 그 자체로 여기기 때문이다. 군주의 술책은 인민을 길들이는 것이다. 왕의 호의로, 사창가와 술집과 도박장으로, 왕에 대한 신화로 인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80년대 군부독재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대표되는 소위 3S로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켰다. 82년 프로야구 출범, 80년 컬러 TV 방송 시작, 82년 야간 통행금지 해제로 늘어난 성매매 업소 또는 VTR 보급과 맞물린 포르노테이프 등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우민화정책의 실상이었다. 최근에는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가운데 거의 모든 부문에서 탈정치화의 경향을 보인다.
 
 

이상하게 보이는 이 사회에서는 소비주의와 사적 영역이 보장되면서, 성적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떤 탈정치화된 질서를 갖습니다. 이것은 아주 끔찍한 사회의 모습이죠. 62/<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정치’, ‘정치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우리는 얼굴을 구긴다. 굳이 정치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둘 만한 것들이 많다. 4대강 사업은 전국의 자전거 도로 연결이라는 거창한 포장과 자전거 열풍에 가려 정치적 사안에서 멀어진 듯하다.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농민들과 한전 사이의 일은 서울과 밀양의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 되어버렸거나, ‘전력 대란이라는 위험 신호를 무기로 묻어버리거나, 일본 방사능 유출로 인해 한동안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밀양 송전탑은 원자력발전소 증설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살아간다. ‘탈정치화자체도 문제이지만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41,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정치적 의식 부재도 문제이다. 굳이 자유에 대한 망각에서 자발적 복종이 나타났다는 라 보에티의 견해를 따르지 않더라도 자발적 복종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

 라 보에티는 단순히 인민의 노예근성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인민들이 어떠한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말해주고 있다. 그의 말은 단호하고 명료하다.
 

독재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라. 너희들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를 창으로 찌를 필요도 없고, 뒤엎을 필요도 없다. 다만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 28-29

 (시민불복종) 자신들의 권리를 구현하고 사회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써 권력을 무시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확실한 무기이며, 점점 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175/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라 보에티가 말하는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시민불복종과 같다. 시민불복종은 권력과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공적인 행동으로 권력과 법의 불의함에 저항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방식이기도 하다. 무언의 지지조차 하지 않는 것, 우리의 침묵과 무관심이 권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 자유에 대한 망각이 자발적 복종을 낳았듯 자유에 대한 의식으로 시민불복종을 낳을 것 등.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으며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폭군을 살펴보라. 폭군은 마치 하나의 불꽃과 같다. 그는 자그마한 불티에서 발생하여, 점점 커진다. 사람들이 땔감을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불은 더욱더 많은 것을 태워 삼키며, 강대해진다. 만약 불 주위에 더 이상 탈 것이 없다면, 화염은 조만간 꺼져서 사멸해 버릴 것이다.

 
 
땔감을 던지지 말아라. 그러면 불꽃은 사그라들 것이다


'학생의 용의복장은 단정해야 한다!?"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내가 던진 물음은 다음과 같다.

 '학생의 용의복장은 단정해야 한다.'는 과연 학교 규범으로 정당한가?

 사실 너무도 예민하면서도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이다. 학생부에서 일하면서 늘 고민했던 부분이 이거였고 아직까지도 확신할 만한 답을 갖지 못한 것도 이거다. '학생'과 '단정함'이 결합하여 거의 모든 학교의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정작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이 궁색할 때가 많다. '단정한 게 좋은 거니깐.', '몸이 단정해야 마음이나 생각이 바르게 된다.', '염색하면 성장기의 발모상태가 무지 안 좋아진다.', '단정의 반대는 불량이다.' 등등. 결국에 가서는 '학생이니깐'이라는 답변 이상의 말은 나오질 않는다. 물론 단정한 용의복장이야 나쁠 것이 전혀 없다. 비단 학생에게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도 사실 없다. 

 언제인가 내가 출근할 때 아내가 내 옷을 보더니 그렇게 입고 가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가 더운 여름이어서 청바지에 로보트가 그려진 회색 티셔츠 한 장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왜? 날도 덥고 이게 편해."라고 말하니, 아내의 말은 "단정하지 않잖아."였다. 사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우리 학교 선생님 복장이 다른 학교에 비해 꽤나 자유로운 편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방인 아닌 '이방인'의 시선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이렇습니다. "보편적 선(좋음)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197/<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누구나 그 집단 안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을 떠올려보면, '단정함'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무엇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방인'이 되어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학교 밖의 이방인인 아내는 학교 안의 내부자가 되고 있다. (집에 가서 '왜 학생은 단정해야 하는데?'라고 물어봐야겠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단추를 하나를 풀면? 아니 아예 풀어헤치고 다니면? 슬리퍼를 학교에서 정해준 것이 아닌 내 마음에 드는 걸로 신고 다니면? 귀걸이로 잔뜩 멋을 부리고 파마나 염색으로 머리를 치장하면? 이런 학생을 복도에서 만나서(실제 우리 학교에는 없지만), "학생이 이게 뭐니? 단정하지 않잖아!"라고 나무랄 때, 그 학생이 아주 공손한 말과 태도로 "선생님, 왜 학생은 단정해야 하는 건가요?"라고 물어보면? 
 사실 어쩌면 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그 학생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다만 어떤 것이 단정한 모습인지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단추는 제대로 채우고 다녀야 하며, 염색이나 파마보다는 생머리로 길지 않게 적당한 길이로 묶고 다니고 윗도리는 치마 속에 넣고 조끼나 가디건을 입고 귀걸이나 목걸이는 하지 않고 치마는.... 치마는 몇 년 전만 해도 무릎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지도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릎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 허용하는 걸로. 단 '너무' 짧으면 안 된다, 무릎 위 몇 센티까지는 허용한다....식으로.(실제 규정은 어떤지 확인해봐야겠다.) '단정함'의 구체적 기준이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단정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단정함의 기준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단정함' 그 자체가 과연 학교 규범에 자리잡을 만한 것인지, 그 이유가 분명히 무엇인지가 문제의 본질인데, 그걸 충분히 생각해봤는가가 문제이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 '학생이니깐, 단정한 게 좋잖아.'라는 식으로만 말하면 뭔가 '자발적 복종'이나 '강요'의 뉘앙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도덕률에 근거한 윤리는 정치화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정치화라는 것을 통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공동선'이 우리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26
 
'단정함'이야 '공동선'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다. 하지만 학교 구성원이 모두가 공유해야 할 규범적 질서의 하나라면, 무조건 전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학교 규범의 하나로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 이유와 정당성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결론이야 '그렇기 때문에 학생은 단정해야 한다.' 또는 '그렇기에 단정한 것이 좋다.'로 내려지더라도,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당황해 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모두가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정이 좋지 않은가. 거창한 말 같지만 '윤리의 정치화' 정도는 거북해하지 않아야 하지 않은가. 가끔은 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왜 그런지에 대해 생각해보지는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요즘 아들이 당연한 걸 자꾸 물어봐서 대답해야 하는 입장이라 이런 생각들을 하나 보다.)


 솔직히 이 문제랑 비슷한 것들에 대해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불편하다. 예를 들면 왜 학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냥 그러는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편한데, 혹시 '왜?'라고 공손하게 묻고 토론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나타날까봐 말이다. 내일 당장 나에게 물어봐도 결론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면 '왜?'라는 질문에는 답을 제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차라리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주먹으로 싸우면 안 된다.', '왕따를 시키는 일은 절대 안 된다.', '도둑질은 안 된다.'와 같이, 아니면 자유, 평등, 사랑, 정의 등과 같이 굳이 그 이유까지 설명해서 설득할 필요가 없는 가치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문제라면 좋겠지만, 사실 '단정함'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불편하다. 가끔은 나는 교사라는 이름을, 너는 학생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리고 까놓고 이야기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게 훨씬 나을 수도 있을 때가 있으니깐. '자발적 복종'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 '윤리의 정치화'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2013.11.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