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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사르트르)

onmaroo 2013. 4. 22. 20:18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사르트르)를 읽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저자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8-01-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945년 당시의 시대적 화두, 휴머니즘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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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사르트르가 1945년 10월 29일 파리에서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한 강연을 기록한 책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본령을 담은 책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나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에 무지하거나 그 말이 주는 뜬구름식의 느낌만을 가진 사람에게는 실존주의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강조한다는 점, '기투'와 '선택' 속에서 '책임'을 이야기했다라는 점은 인상 깊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다른 대상, 예를 들면 '종이 자르는 칼'과는 다르게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설명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예를 들고 있는 '종이 자르는 칼'은 '칼'의 개념, 제작법, 생산기술 등을 참고하여 장인이 제작한 것이며, 칼에 대한 개념, 제작법, 생산기술과 같은 본질에 의해 '종이 자르는 칼'의 현존은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실존주의의 제1원칙, 주체성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 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원칙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33쪽)

 

  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우리는 인간은 먼저 실존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하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끼나 부패물 또는 꽃양배추가 아닙니다. 인간은 우선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투(企投 projet)인 것입니다. 이 기투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기투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하늘에도 또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자신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 기투하게 될 무엇이지, 결코 그가 되기를 원할 미리 존재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34쪽)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만약 신이 없다고 한다면'이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이 강연에서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은 벌이지 않고 그저 '무신론적'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은 칼을 만드는 장인과 같은 존재인 신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장인'으로서의 신을 설정한다면 인간 역시 '종이 자르는 칼'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이 마련하거나 참고한 본질에 따라 이미 정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 식으로 말이다. 이는 사르트르에게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을 거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딱히 입장이라거나 생각을 펴기 어렵다.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는 매력을 느끼는 터라,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고 이 둘을 적절하게 절충할 만한 능력도 없고 쟁점이 되는 문제로부터 벗어날 만한 새로운 견해도 내세울 자신도 없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성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주체성이 강조되고 있고, 세상에 기투(던져진)된 존재로서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이 지극이 개인의 주체성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즉 '모든 인간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는 점 때문이다.

 


개인의 행위는 인류 전체를 향한다. 


  우리가 인간은 스스로를 선택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우선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또한 우리 각자가 이처럼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인간을 선택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되기 원하는 인간을 창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또한 우리가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행위 중에서 그렇지 않은 행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중략)……

   자기 자신에게 앙가제하는 인간, 그리고 자기란 한편으로 그 자신이 되기를 원하여 선택한 무엇이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을 선택함과 동시에 인류 전체를 선택하는 입법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전적이고 깊은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5~38쪽)

 

  '기투', 즉 세상에 던져진 존재에서 '주체성'을 끌어내고 '선택'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롭다는 생각을 전개하며, 인간의 자유를 인류 전체로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휴머니즘'의 단초를 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폭력성을 목격한 사르트르가 인간의 실존에 대해 탐구하면서 ‘주체성’, ‘자유’, ‘선택’, ‘책임’, ‘불안’으로부터 ‘휴머니즘’에 이르는 실존주의 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과 인류에 대한 책임은 '불안'이라는 개념을 낳는다.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이기에 그 선택은 가치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선택'은 '자유'를 전제로 하지만 다른 가능성에 대한 '불안' 또한 낳게 된다. 그리고 이 '선택'에 따른 '책임'과 '불안'은 타인(인류 전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가 보기에 ‘선택’에 뒤따르는 '책임'과 '불안'은 인간의 실존이 지닌 동전의 양면과 같았을 것이다.

 

  다수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할 때, 그들은 그 선택된 가능성이 오로지 선택되었기에 가치를 갖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존주의가 기술하는 이런 종류의 불안이 타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에 앙가제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름 아닌 바로 이 책임에 의해서 이 불안이 설명된다는 사실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불안은 결코 우리를 행동으로부터 분리시킬 장막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행동 자체의 일부분을 이룹니다. (41~42쪽)

 

 '불안'에 대해서는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책임감을 느껴본 모든 사람이 아는 단순한 불안입니다.'라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하게 하게 되는 ‘선택’ 속에서 ‘책임’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이 길이 과연 맞는 걸까?’, ‘내 선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등.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이런 질문 속에서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한다. 하지만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정답은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택을 하는 ‘나’의 몫이고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과는 별개로 누구나 다른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뒤따르는 ‘책임’(‘나’와 ‘인류’에 대한)의 무게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안’은 때론 사람들에게 나약함으로 비춰진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을 나약함의 증거라고 판단해버린다. ‘그렇게 불안해한다면 너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확신을 할 줄 모르는 나약한 존재인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감춘다.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로 비춰질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존주의에 따르면 ‘불안’은 자유로운 인간의 실존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감정이다. 불안을 ‘행동 자체의 일부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즉 ‘불안’은 자신이 그만큼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니 '불안'을 '나약함'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로움을 포기하는 것이 비겁한 것이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며 ‘우리가 되기 원하는 인간을 창조하는 행위’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선택’의 행위는 ‘타인’의 존재에까지 지평을 넓힐 수밖에 없다. 단순히 내 맘대로 산다는 식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고 누구나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는 자유를 말한다.

 


 상호주체성과 휴머니즘


  나를 생각하는 타인, 나를 위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나와 맞서는 경우에만 원하는 그런 타인 또한 발견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호주체성으로 부르고자 하는 세계를 곧바로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무엇인지, 타인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 속에서입니다. (66쪽)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의 자유와 선택은 ‘너’의 자유와 선택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상호주체성’이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실존주의가 단순히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와 ‘너’의 구분, 개인과 집단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이미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 수밖에 없다. 생각의 지평은 ‘나’에서 출발할 수 있으나 ‘너’로 이어져 ‘인간’에 대한 무엇에 맞닿아야 의미를 낳는다. 이쯤 읽게 되었을 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 제목의 의미가 조금은 와 닿았다.



 책을 읽고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사르트르가 파리의 한 클럽에서 그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이 강연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그토록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그에게 실존주의 철학은 절실한 것이었을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그의 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실존주의가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도 내 생각과 지식은 일천하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시하는 인간의 ‘자유로움’이 인간을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규정할 때에만 언급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 또는 실존적인 조건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성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며, 그에 따른 책임(불안이 동반되더라도)은 ‘나’와 ‘타인’을 아우르는 ‘모든 인간’에 걸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게 된다. 물론 당장의 내 생활이 이로 인해 바뀌거나 변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갈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의 결이 조금은 달라지거나 매끄러워지는 느낌이다. 적어도 내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힘은 조금씩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덧붙이며 

읽어라, 읽어라. EBS 수능특강 <독서> 지문에서 본 중국 당나라 사상가인 한유의 말처럼 ‘빠지되 독서의 방향은 잃지 말 것’을 기억하며 읽어라. ‘근면과 독창성’을 함께 갖추며 읽어라. 읽으면 열리겠지. 아직은 문제집의 지문 분량 정도의 독서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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