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03. 비전은 가르칠 수 있다.

onmaroo 2013. 2. 1. 11:58

비전은 가르칠 수 있다.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를 읽고.(3)


 책의 후반부에서 '비전은 가르칠 수 있다'라는 다소 짧은 글은 이 책을 마무리하는 글로 충분할 만큼 의미심장하다. 


 인문학은 인간적인 태도와 인류라는 두 가지 점에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반드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인류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만일 인문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며,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322쪽)


 대학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집안의 부유함을 바탕으로 하던 '찻잔의 시대'에는 교양인이 되는 일은 남보다 우월한 사람이 되는 일과 같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교육의 혜택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로 인해 촉발된 자연과학에 대한 맹신이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전문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폭넓게 실천적 대안들에 대해 살펴보고 삶과 목표에 대해 성찰하는 소크라테스적인 에토스보다 전문화된 식단만을 먹기 시작한 대학교육의 현실을 카우프만은 지적하고 있다. 비판정신의 함양을 미국에서 그나마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대안들에 대한 전망이라는 비전을 가르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317쪽)도 덧붙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카우프만은 비전을 가르쳐야 하며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1.  우선 비전은 맹목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맹목을 가르쳐 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스스로 자신의 조건들을 고려하고 대안들을 볼 수 있도록 해 덜 맹목적이 되도록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전은 가르칠 수 있다. (318쪽)


 맹목은 비전의 부재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교육은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 권위를 부여한 것들에 대해 성찰하는 능력을 거세한 교육이다.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학교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에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나온다.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든 없든 싫은 것을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병원의 환자들은 환자 자신이 직접 수술을 집도할 수 없더라도 수술 집도 의사가 녹슨 메스를 사용하려 한다면 이에 항의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 같은 의미에서, 학생들 역시 자신의 4학년 읽기 자료를 대신할 멋진 책을 집필하고 삽화를 그려 넣고 인쇄하고 제본할 기술이 없더라도 지루하고 엉터리 같은 책을 보며 분노할 권리를 가진다. 어른이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42~43쪽)


 '나쁜 것을 주입하는 교육'에 대한 윤리적 대응이 '좋은 것을 주입하는 교육'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유일한 대응책은 주입을 하지 않는 것이리라.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개방적인 생각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그 답이다. (132쪽)

 '생각의 진정한 자유시장' (133쪽)

  교사는 첫째 허위선전과 압제, 부당한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째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솔직히 피력하기 훨씬 이전부터 학생들에게 모든 논쟁 방법과 전략을 알려주기 위해, 셋째 학생들이 교사의 반대의견을 또 반박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실제 데이터와 모든 가능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135쪽)


 '불복종 교육'의 어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태도, '교육은 중립적이지 않다.'라는 교육관을 제시하는 코졸의 시각은 카우프만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비전을 구분 짓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인문학 교사는 학생들의 눈이 과거에 열려 있도록 해야 한다. …… 왜냐하면 과거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만 현재에 대한 어떤 전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자신의 조건과 사회에 대해, 그것의 문제점과 현재의 경향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18쪽) 


3. 또한 비교의 기준들을 획득할 때에만 전망을 얻을 수 있다.  …… 과거의 위대한 작품들과 현재의 것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기대에 부합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318쪽)


 여기에서도 읽기의 한 방법론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이를 바탕으로 '차이'에 주목하며 읽는 대조적인 읽기 방법은 교육적으로도 유용할 듯 싶다. 하지만 '차이'에 주목한 읽기 행위가 아이들의 생각을 때로는 수정하거나 때로는 체계화하면서 변화의 흐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의식을 발견하는 일에서부터 읽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4. 미래에 대한 비전은 가르칠 수 없다. 히브리의 예언자들조차도 그런 안목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이 계속 이렇게 행하고자 한다면 이런 저런 끔찍한 결과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라. (319쪽)


5. 인문학의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향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과 사람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런 의문들과 함께 또한 우리는,  ……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대안적인 목적과 관련해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것은 책임감의 정수이다. (320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에 해당하는 좋은 책이 하나 떠올랐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라는 책. 


 누군가가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입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라는 배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저마다의 일거리가 없어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진한다는 것이 타이타닉호의 본질인 것입니다. …… 오는날, 세계 전체에 퍼져있는 현실주의는 그러한 현실주의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주의적인 경제학자가 타이타닉호에 '전속력으로'라는 명령을 하려고 합니다. '속력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타이타닉호의 논리,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앞의 책, 17쪽)

 

 이 세계 규모의 문화적, 환경적 재난은 이 세계경제 시스템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일어날 것이다, 라는 예측이 아니라, 지금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중의 '현실'인 것입니다.  ……  현실주의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선 첫째로 현실을 보지 않으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19~20쪽)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맹점, 실제 현실을 보지 않은 채 '현실주의적'을 운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타이타닉 현실주의'이고 우리는 이러한 논리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장에서도 이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교육이 '타이타닉'호를 멈출 힘을 아이들에게 길러주기를 기대하지도 못할 것이다. 


6. 틀림없이 우리는 학생들이 좀더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 직관, 예감, 아이디어로 가득 찬 진정으로 창조적인 것은, 찾는 것을 배우는 일이며, 때로는 매우 신속하게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를 배우는 일이다. '진보적인' 교육자들은 다양한 예감들에 대해 엄격하게 분별해야하는 필요성과 훈육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아이들은 하나의 예감이 다른 것만큼이나 좋다고 믿도록 이끌려져 왔다. 전문화 시대는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과잉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320~321쪽)


7. 통찰가를 키워낼 수 있는 방법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견해에서 빠져나와 다른 대안과 반대 의견을 찾아보도록 밀어내는 것이다. 초등학생에게도 다른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것의 반대 의견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격려할 수 있다. 비전은 자기-비판과 불가분한 관계이며, 자기-비판은 가르칠 수 있다. (321쪽)



 인문학의 중요성은 인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대이건 아니건 변함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인문학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는 일은, 마치 '타이타닉 현실주의'와 같이 잘못된 전제나 당장의 유용성 차원에서만 다루어져 무기력한 논의로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기껏해야 생활의 여유에 따른 문화강좌 신청의 수준에서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시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 중등교육에서 인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을 쌓게 하기 위한 교육활동이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등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지는 못하다. 아마도 입시에 필요한 시험(수능이나 논술시험)에 얼마큼 유용한 것인지 불안해하기에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이 목표로 하는 대학수학능력(대학에서 학문을 할 만한 능력?)에 대해서도 역시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운운하고 있는 것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입시에 둘러싸인 교육 현장에서 독서교육에 대한 확신을 교사로서 가지기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질 필요가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어쩌면 앞으로 남은 30년이 안 되는 나의 교직 생활에서 경험으로 축적하고 세워야 할 확신이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