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01. 실천 대안은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문학의 미래>)

onmaroo 2013. 2. 1. 01:00

우리 시대의 실천 대안은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다. 

  -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를 읽고.(1)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라는 부재가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인문학 독서법으로 변증법적 독서를 권장한다. 변증법적 독서의 첫 번째 요소는 '소크라테스적' 요소이다. 소크라테스는 비전과 비판정신을 모두 갖춘 통찰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문적 권위나 학제의 틀에 갖혀 엄격함만을 내세우는 사변가도 아니다. 기존의 권위나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과 비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적 유형은 소위 '비평가'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었으니, 나 역시 변증법적 또는 소크라테스적인 독서와 그 후기를 써야 할 것만 같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능력이 안 된다. 이럴 때는 발췌가 좋다.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서문에 나와 있다. 


1.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삶의 목표, 실존의 이유, 인간의 궁극 목적에 대한) 대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3. 비전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4. 비판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서이다. 


 카우프만은 인문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 비전과 비판정신을 모두 지니고 있는 통찰가형, 학문적 엄숙성을 드러내는 사변가형, 시대성보다 최근의 이슈에 더욱 관심을 보이지만 전문성조차 의심받는 저널리스트형, 통찰가형에 비하면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사변가형에 비하면 오늘의 권위나 지식에 끊임없이 질문과 비판을 가하는 소크라테스형. 카우프만은 통찰가형만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속한 학제적 울타리 안에서만 사고하는 사변가형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는 않으며, 저널리스트형은 이미 부정적인 시각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적 유형을 실천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변가라면 한 가지 접근 방법을 가르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학생들에게 그것을 주입하려고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라면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최신의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일 것이며, 학생들에게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남겨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적 교사라면 대안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며 지속적인 자기반성을 요청할 것이다. (89쪽)


 다양한 관점을 오늘날의 통념이 지닌 문제점과 비교하는 소크라테스적 질문은 좁은 주제에 대한 기계적인 토론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런 추세가 한번 탄력을 얻게 되자 사변가들의 합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적 비판은 위험하게 여겨졌다. (97쪽)


오랜 시간동안 우리 시대는 사변가와 저널리스트라는 두 가지 유형만을 양산해왔다. (112쪽)


소크라테스적 유형의 축소가 문제가 된다는 건, 위대한 통찰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천적 대안으로서 비판적이고 비평적인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점을 말한다. 한 우물을 파든, 여러 우물을 파든 전문성을 기본 능력으로 요구하는 시대, 뭐든 이슈화시킬 수 있는 작동기제는 충만하나 무엇이 진정 문제가 되고 있고 이슈화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재한 시대에는 사변가와 저널리스트라는 유형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과 모레의 인간'으로서의 철학자가 '자기 시대의 오늘과 맞서'야 한다는 통찰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철학자는 '자기 시대의 죄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속했던 시대에 대해 무자비한 비판가였던 철학자의 예로 소크라테스를 언급한다. (66쪽)


 '자기 시대의 오늘과 맞서야 한다'가 '내일과 모레의 인간'과 만난다면 그건 통찰가이다. 하지만 비록 '내일과 모레의 인간'까지는 못 되더라도 '자기 시대의 오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다. 카우프만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절실해질 만큼 '인문학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듯 싶다. (이 책이 1977년에 첫 출간된 것이라고 하는데, 2013년에도 읽힐 만한 책이니)


-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이런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

 "너무 뻔한 얘기야. 이걸 누가 몰라?"

  :: 너무 당연하지만 꼭 이야기할 만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