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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 되면~] 제2장 '비상식적'인 헌법 (2)

onmaroo 2011. 11. 21. 19:05
 
 앞에서 우리는 일본 헌법 제9조가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을 방기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교전권과 자위권은 다르지 않기에 일본은 자위권을 주장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헌법 제9조의 수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국가는 교전권을 포기할 수 없으며 그것이 '현실주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은 안 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헌법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꼴이죠. 

 그렇다면 일본 헌법 제9조는 과연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일까요?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 정말 '비현실적'인가요? 얼핏보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위험을 감안한다면 국가가 전쟁 상황이 벌어질 때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을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평화에 대한 염원이 그저 인류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소망'일 뿐이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한낱 유토피아적이며 비현실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평화'는 한낱 구호에 불과할 뿐이게 됩니다.  

 러미스는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은 결국 '군대가 사람을 죽이는 권리'이며, 이는 마치 국가에게 부여된 '정당한 폭력'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국가는 이 '정당한 폭력'을 자국민을 보호하기보다는 자국민에게 행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이 국민이 국가에게 폭력 행사 권리를 부여한 결과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러미스는,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 국가에게 부여된 '정당한 폭력'에 대해 이는 결코 정당하지도, 현실적인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위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을 포기하고 있는 일본 헌법 제9조는 '평화'에 대한 올바른 상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러미스의 말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앞서 이야기한 결론에 도달해볼까요?

 
교전권이라는 것은 전쟁을 하는 것 자체의 권리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이라면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특별한 권리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권리인 것입니다. (25쪽)


 러미스는, 교전권은 곧 '사람을 죽이는 권리'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상식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리가 말이 되나요?

 전쟁법에는 확실히, 전쟁중의 심히 잔학한 행위를 전쟁범죄로 제재하려고 하는 인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을 '인도적인' 행위로 하여, 결과적으로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국가의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6쪽)


 아이러니하게도 '전쟁법'이라고 하는 것이, 인도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전쟁을, 즉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허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전쟁법'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세상이 아이러니한 거죠. 
 이어서 러미스는 국가에게 부여된 '정당한 폭력', 즉 교전권을 내세우면서 행사하는 전쟁의 폭력이 마치 '폭력'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현상에 대해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도 미군은 때때로 이라크를 공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문 1면의 큰 기사가 아니라, 5페이지나 6페이지쯤의 작은 기사로 적혀 있습니다. 몇명이 죽었는가 하는 것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아마 미군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는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사를 읽어도 거의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즉, 국가가 하면 좀처럼 폭력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중략)...... 
 정부가 도대체 왜 이렇게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죽는다는 현상 그것을 우리들은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이나 아픔이 우리들에게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피해자 쪽에서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현상인데도 말입니다. (29쪽)


 국가가 행사하는 그 '정당한 폭력'은 분명 '폭력'인데도, 희한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폭력'으로 느끼지 않는 것이죠. 이를 두고 러미스는 '국가가 아직 완전히 탈신비화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국가의 폭력행사의 권리는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바로 국민입니다.

 정치권력의 역할으로부터 생각해보더라도, 국가권력은 국민의 지지(적극적인 지지건, 소극적인 승인이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에 '정당한 폭력'의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국민이 국가에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됩니다. (31쪽)


 그렇다면 왜 그런 '권리'(?)를 준 걸까요?

 국가가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가 가장 명확히 나와있는 것은 17세기 영국의 토마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국가가 없다면 '만인과 만인의 투쟁',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폭력의 권리를 정부에 넘겨주면, 정부가 대신해서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홉스의 말은, 비폭력 사회가 되지는 않지만, 폭력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31~32쪽)


 간단히 이야기한다면, 국가에 부여한 '정당한 폭력'이 전제하고 있는 가설은, 

 리바이어던, 즉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를 만들면, 사회는 안전하게 된다는 가설입니다. (32쪽)

 그렇다면 이 가설은 실제 실현되었을까요?

 20세기만큼 폭력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가 많았던 100년간은 인류의 역사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기록입니다. 그리고 누가 가장 많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면.....(중략)..... 그것은 국가입니다. (33쪽)


 러미스는 소제목 '국가는 국민을 지켜온 게 아니다'에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지만 사람이 가장 많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 전쟁'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와이 대학의 '럼멜'이라는 학자는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에서, 국가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수는 지난 100년 동안 2억명에 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또한 그 책에 따르면, 살해된 사람은 외국인의 수보다 자국민의 수가 더욱 많았는데, 그 수는 2억명 중 1억 3천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국가가 살해한 2억명 중 대부분은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 즉 민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두고 럼멜은 '데모사이드(democide)'라고 말합니다. 국가가 고의적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죽인다는 의미죠. 러미스는 이러한 데모사이드가 '정부에 의한 명백한 살인'이라고 못박습니다. 

   민살  전쟁
 대의 민주주의 2,028,000 4,370,000
 권위주의 28,676,000 15,298,000
 전체주의 137,977,000 14,354,000
 기타(테러 등)  518,000  
(책 36쪽 표, 럼멜의 책에서 인용됨.)

 이 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나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에 비해 대의민주주의가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마도 '민살'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럼멜 역시 이 표의 결과를 두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수치에 대한 '상대적' 비교치가 혹시 국가에 부여된 '폭력'을 다시 '정당한 폭력'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조심해야 합니다.
 러미스가 이 표를 인용하면서 덧붙인 말을 봅시다.

 확실이 이것은 민주화운동의 대의명분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잊어서 안될 것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나라는 이른바 대의 민주주의 국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6쪽) 

 그러면, 제9조는 전쟁, 교전권, 국가의 '정당한 폭력'의 숨겨진 위험성의 반대항격인 '평화상식'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자위대가 있고, 미군기지가 있다는 모순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또하나의 사실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일본국 헌법이 성립한 이래 반세기 동안 일본정부가 교전권에 근거하여 단 한 사람의 인간도 죽인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후 반세기 동안 일본인들은, 2세대 혹은 3세대에 걸쳐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전쟁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로서 성장한 것입니다. 즉,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은 이 사회에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나는 이전부터 일본의 '평화상식'이라고 불러왔습니다. (39쪽)

 러미스가 말하는 '평화상식'은 일본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겁니다. '세상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니, 이해해라.'라는 말이 인간의 상식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전권'과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당연한 상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일본 헌법 제9조는 '평화상식'을 담은 조항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 이 조항을 '비현실적이다'라고 비난하면서 '교전권'의 불가피성을 '현실적' 또는 '상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몰상식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전권은 부활하고 있습니다. 러미스는 '교전권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위대법 개정에서 무기사용은 형법 제36조, 37조의 원리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36조, 제37조는 개인의 정당방위에 대한 조항입니다. 하지만 자위대는 엄연한 군대 조직이므로, 교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기 사용은 개인의 정당방위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일본정부는 이 두 조항을 어긴 자위대원을 체포할까요? 아마 그 조항들을 따를 의무를 그냥 면제해줄 겁니다. 그러면 이를 면제하는 정부의 권리, 또는 그 근거는 뭘까요? '교전권'밖에 없습니다. 즉, '교전권의 부활'입니다. 

 미국에 대한 후방지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마련한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은 결국 '교전권'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입니다. 일본 헌법 제9조는 교전권을 일본 정부에 주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신가이드라인 관련법은 헌법 제9조를 '지키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러미스는 일본의 반전평화운동의 중심 테마는 '저항'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운동인 '프로테스트'에서 나아가 실천운동이자 실력운동인 '저항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제2장을 마무리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신가이드라인 관련법, 특히 주변사태법에 의해서 '구9조'가 일본국민의 집단적인 결단으로서 부활할 가능성도 주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58쪽)

 러미스는 일본 헌법 제9조의 '평화상식'을 무시하고 '교전권의 부활'을 '현실주의' 또는 '상식'이라 믿는 일본의 현실에서, 진정한 '상식'은 '평화'에 대한 신념임을 강조합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명령이자 평화에 대한 '상식'인 일본 헌법 제9조, 정부가 국민에게 내리는 명령이자 '교전권의 부활'을 당연시하고 있는 주변사태법. 이 둘의 아이러니한 대치 상황에서, 러미스는 오히려 저항운동으로서 반전평화운동의 움직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p.s.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러미스의 주장이나 글의 결론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모른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교전권을 당연시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추구하자.' 등등... 하지만 그래서 러미스의 주장은 철저히 '상식'의 범주에 들어서 있다. 그래서 진정한 '상식'의 범주에 들어서 있지 않으면서도, '상식'임을 자처하는 생각과 이념과 주장들의 실체가 확실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는 어렵지 않은 말들로 굉장히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과 주장을 이어간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2011.11.21.  onmar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