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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안광복) /마구독서

onmaroo 2021. 10. 3. 02:26

불편한 질문, 좋은 삶의 고민 

 

독서도, 생각도 마구잡이식이라 일단 기록부터 해둔다.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

철학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고 30만 명이 넘는 독자들을 철학의 세계로 이끈 저자 안광복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낯설고도 도발적인 22개의 물음을 던진다.

www.aladin.co.kr

 

행복의 만족도는 연소득 1억 8천 만원까지만

-이스털린의 역설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가진 것이 많아져도 더 이상 행복도가 증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연평균 소득 1억 8000만 원이 넘었을 때부터 그렇다고 한다. 사회복지가 더 잘 갖추어진 사회에서는 연봉 6000만 원 정도가 되면 돈이 더 이상 행복감을 늘려주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8)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생을 꾸려가는 힘에는 결핍욕구와 존재욕구가 있다고 한다. 이스털린의 역설에서 인간은 결핍욕구에 영향을 받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행복은 결국 존재욕구의 문제라는 뜻일 거다. 그래도 연평균 소득 1억 8천만 원의 한계점은 이스털린의 역설을 일반화하기에는 많은 금액이다. 그것에 대부분은 미달하니깐, 결핍욕구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 여기서부터 맥이 빠진다. 어쩌면 결핍욕구의 한계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열패감이나 체념이 존재욕구의 가치를 추구하는 동기가 되는. 제길 1억 8000만 원이라니....

그래도 결핍욕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존재욕구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이스털린 형님의 말을 믿어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보자....

이전의 '나'와 경쟁하기

-팔꿈치 사회

'팔꿈치 사회'는 1982년 독일에서 '올해의 낱말'로 꼽혔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밀치고 앞서가야만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우리사회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24)


콜린스 사전이 선정한 2020년 올해의 단어는 '록다운(lockdown)'.
우리나라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我是他非(아시타비)'.
코로나19가 창궐해도 우리나라는 역시 정치권의 행태가 더 주목받나 보다.
그나저나 강수돌 교수의 <팔꿈치 사회 :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갈라파고스) 책은 사두고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어디다 둔 거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flow)의 조건으로 '분명한 목표, 성취 가능성, 신속한 보상'이 있다고 했는데(26), 이걸 나에게나 학생들에게도 적용할 만한 것은 없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목표는 구체적이고 분명해야 한다.
-목표를 단계적으로 설정하되, 성취 가능한 수준에서 설정해야 한다.
-목표 달성에 따른 보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만족스러운 것, 작더라도 신속하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성적이나 대입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그렇다. 경쟁의 대상이 항상 다른 사람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런 아이들에게 항상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말은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다는 식의 지적과 같을 때가 많다. 노력해야 한다면 경쟁의 대상을 이전의 자신으로 삼으면 좋겠다. 물론 인생을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장 폴 사르트르의 명언 : '타인은 지옥이다'(39)

희곡 <닫힌 방>의 대사라고 한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뜻은 아닐 거다.

영겁의 고리를 끊다

-니체의 영겁 회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의 삶이 '영겁 회귀'한다는 희한한 주장을 했다. 즉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무한히 살아온 인생을 또다시 거듭하고 있다는 뜻이다. 니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힘들고 어려운 순간, 피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를 떠올려보라. 주저하고 멈춰 선 것을 나중에 후회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는 지금 행동에 따른 후회와 좌절이 다음 생애에도 거듭된다면 어찌할 지 따져보라고 충고한다. 지금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무한히 계속될 후회를 끊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니체의 설명은 큰 틀에서 바라보는 전략형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30)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경쟁의 굴레 속으로 던지는 경쟁형 인간보다, 자신의 목표에 집중하는 전략형 인간이 되라는 말인데. 니체의 영겁회귀(또는 영원회귀)는 고리와 같은 원의 형태로 원 위의 모든 점이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간의 선후 개념이 사라진다. 따라서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의미를 둘 수 있다. 반복의 고리 속에서 나는 이전과 같이 후회하며 이번 생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리를 나선형으로 확장하며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동일한 원의 반복보다 나선형의 고리가 낫겠다.
기회가 되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공부하는 걸로....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세상은 불공평하다. 놀이로 즐기는 게임이 그렇다면 그만두면 된다. 하지만 살아가는 일은 그만둘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정당하다. 다만 그 다음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 불만과 분노를 어떻게 표출할 것이냐, 무엇부터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느냐, 불평등을 어떻게 줄일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어야 할지 등등.

마르크스가 꿈꾼 세상의 모습은 이렇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73)


현실은 이러하다.

마르크스의 희망과 달리, 그가 꿈꿨던 평등한 세상은 '필요한 만큼 일하고, 능력만큼 소비하는' 가장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뜻을 좇아 만들어진 옛 소련 같은 사회주의 나라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무임 승차자(free rider)' 문제는 사회주의의 고질병이다. '능력만큼 일한다'는 이상은 현실에서 '남들만큼은 일하지 않겠다.'로 나타났으며, '필요한 만큼 소비한다.'는 모토는 줄어든 노동에 따라 소비할 물자가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공염불이 되었다.(74)


집 주변으로 잔뜩 들어선 신축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 저 집 중에 단 하나도 우리집이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 집값은 좀처럼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공행진을 이미 여러 번 한 바 있다. 대출금은 이미 30년 상환의 조건으로 받아두고 매년 매달 조금씩 줄이고 있다. 물론 빌라를 내 집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직업의 안정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황이니, 난 그나마 형편이 나은 거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 저 아파트를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직업과 소득의 차이, 재테크와 경제에 대한 관심과 투자,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과 성장과정의 환경 차이 등등이 모두 결정 요인으로 작용한다. '열심히 일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자.'는 것도 우리 아버지 세대 때의 일일 뿐이다. '열심히 일해도 내 집 마련은 어렵다.'가 현실이다.
차라리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으면 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다. 전세금을 모두 가족들의 세계 여행에 사용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이 아닌 다른 부분에 돈과 시간과 마음을 더 쓸 수 있다. 자동차를 바꾼다든지, 살고 싶었던 곳에서 살아보기라든지, 직장과 일에 매달리지 않고 내 여가와 취미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든지, 아이들과 함께 미뤄두었던 추억들을 쌓는 일들을 해나가든지......
난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다른 방식으로 진행했고, 전세금 올려줘야 하는 걱정은 없어졌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방을 마련해줘야 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 단독주택에서의 삶이 어릴 적의 추억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불평등한 세상인 건 안다. 그렇다고 불평등과 불공정이 당연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평등과 공정의 가치는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불평과 불만 속에서 분노를 키우는 일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금수저들을 모아다가 무조건 그들을 욕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자고 외치는 일을 할 수도 없다. 평등과 공정이라는 가치를 좀더 실현할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다. 하지만 불평등을 개인의 무능력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는 옳지 않다.
다만 나의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불평등한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평등하게 주어진 것들에 주목하고, 남들과의 비교보다 '나' 자신에게 좀더 집중해야 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는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아무리 비참한 지경이라도, 그 상황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할 자유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나의 고통이 가치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는 일이다." 나의 고통을 의미 있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사람은 의미를 찾는 존재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현명한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낸다. 아무리 부유하고 좋은 환경에 있다 해도, 자기 삶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남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는 삶은 끊임없이 휘둘리기 때문이다. (76)


내 삶이 휘둘리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내가 이끌어가기를 바라는가.

세네카의 충고가 눈에 들어온다.

최선을 다해 삶에 몰두하라. 그리고 그 결과에는 초연하라.(76)

하지만 결과가 이미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무능과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