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onmaroo 2013. 6. 7. 09:56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누구의 슬픔인가, 누구의 기쁨인가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봉사 명령으로 나간 요양원에서 어느 고등학생이 몸도 정신도 가누기 어려운 할머니를 대상으로 장난을 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이 재미있는 건지 호통을 치며 장난을 치는 모습은 그저 장난이었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더군요.

  그 아이들은 무엇이 장난이고 즐거움인지 무엇이 슬픔이고 아픔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슬프기만 했습니다. 지나가는 어린 아이를 걷어차 다치게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재미있다며 인터넷에 올리는 일도 그렇지요. 아이들마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잃어버린 시대가 된 것 같아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이런 ‘능력’이란 누가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주는 경쟁 사회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능력’에 가까운 것입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의 머리나 몸에서 그런 기능을 하는 부위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이런 일로 정말 화가 날 때는 그렇습니다.

  나는 간혹 지금의 세상이 무섭기만 합니다.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무섭고, 그저 한순간의 실수나 무관심이 아니라 배려나 공감의 ‘능력’조차 몸에서 지워져가는 것만 같아 무섭고,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행태도 습관처럼 퍼져 있어 무섭습니다.


슬픔을 배우고 우정을 배우고


  그리고 안타깝습니다.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는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인데,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보고 배우면서도 정작 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충분히 갖질 못한 것인지 말입니다. 물론 시 한 편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거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를 읽고 배우는 경험이 우리 삶에 어떤 기억과 배움으로 남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문제를 풀고 핵심 정리를 외우는 시간과 경험으로, 또는 수능 문제를 잘 푸는 능력으로만 남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자질로 남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봐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의 세상이 어떤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가르쳤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이 시를 읽어주고 잠깐 동안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그 잠깐의 시간이 어쩌면 아이들에게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잠깐의 시간이 그 시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시간보다 더 소중하고 필요한 시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이쯤까지 이어지면 선생이란 직업 때문인지, 잘못이니 책임이니 등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데, 누구를 가르치며 누구에게 훈계야.’라는 식으로. ‘선생’이란 직업이 때로는 멍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달라지겠지요. 시도 가르치고 문제풀이도 열심히 하면서도 부끄러움도 가르치고 슬픔도 가르치고 우정도 가르치고 삶도 가르치는 사람으로 달라지겠지요. 그래야 아이들도 달리 배우겠지요.


우리, 서로 안아주면 안 될까




교실은 집과 같다. 우정을 쌓고 공부하고 예의를 배우고 인생을 준비하지. 그러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장소인 거다. 

        -영화 <라자르 선생님>에서


  아이들에게만 교실이 배움의 공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라자르 선생님’은 알제리에서 캐나다로 망명 신청을 한 사람입니다. 알제리 폭탄 테러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어버린 상처를 간직하고 있지요. ‘라자르 선생님’이 캐나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도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담임선생이 그 교실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거죠. 이 영화에서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라자르’와 아이들이 만나 그 상처를 서로 보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학교를 떠나야 하는 ‘라자르’와 어느 학생이 마지막 장면에서 말없이 서로 안아주는 모습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실은 학생들끼리만의 우정을 나누는 공간은 아닙니다. 친구들과의 우정, 교사와 학생 사이의 우정을 함께 나누며 서로가 성장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이젠 우리, 서로 안아주면 안 될까요?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걷고 서로를 안아주기를 바라며,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달라지기를 바라며    (2013년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