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가재미(문태준), 서해(이성복)

onmaroo 2013. 5. 22. 13:37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서해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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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식은 때에 따라 대상에 따라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온갖 정성과 관심을 기울여 그것을 표현해야 할 때가 있는 반면 그 사람을 한없이 기다려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항상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만큼 바라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 이해하고 느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걸 우리는 공감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느껴보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의 처지와 감정을 공감하게 됩니다. 두 눈이 한쪽으로 몰려 그저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가재미’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물에서 건져주기 전에 내가 ‘가재미’가 되어 그 사람이 있는 물가로 헤엄쳐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워주어야 하겠지요. 곁에 있다는 사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마음의 상처나 아픔을 나누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될 테지요.

  가끔은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많은 관심과 표현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을 넘어 집착이나 부담이 될 때도 있습니다. 상처를 받거나 슬퍼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괜찮아?’라고 말하며 곁에 앉아 주는 것도, 말없이 그 옆에 있어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그가 슬픔을 느낄 시간을 주고 슬픔을 매만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도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꼭 나누어야 사랑은 아닐 때가 있습니다. 기다리고 남겨주는 일도 다가가는 일만큼이나 중요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친구끼리 ‘우정’이란 이름으로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우정’은 우리가 함께 가져야 할 소중한 마음입니다. ‘나’와 비슷한 친구이기에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와 다르기에 우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성격이 다를 수도, 처지가 다를 수도 있는 사람이기에 우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이미 소외된 채 살아가겠지요. 친구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을 때에는 ‘가재미’가 되어 옆에 나란히 누워주어야 하고, 때로는 친구의 삶과 그 자신의 몫을 인정하고 남겨주는 배려가 필요할 때에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정은 서로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정은 그를 위해 그만의 자리를 인정하고 남겨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가가고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는 일인 거죠. 그러면 언제 다가가고 언제 남겨두어야 할까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느끼게 되면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래서 공감하고 배려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불리든, ‘우정’으로 불리든 말입니다.

 

2013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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