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노트

달나라의 장난(김수영)

onmaroo 2013. 5. 9. 13:55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數千年 前)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백석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워지며,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단단해지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그런 그의 시 중에서 두고두고 읽어볼 만한 시는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내가 답하는 것보다 이 책의 내용을 읽는 것이 훨씬 낫기에 아래에 옮겨 적어봅니다.

 

김수영은 천생 시인인가 보다. 거미를 보고 자기 이해에 이르렀듯이, 이번에도 그는 돌아가는 팽이를 보고서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팽이를 통해 그는 어떤 이해에 이르렀을까? 무엇보다 먼저 삶은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팽이와 같다는 것이다. 온갖 장애물에 부딪혀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다잡지 않으면, 팽이는 돌기를 멈추고 속절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버릴 것이다. 돌지 않고 바닥에 누워 있는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죽어서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팽이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도는 데 있다. 결코 멈춘 채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의 목적은 죽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도는 팽이는 김수영 앞에서 성인(聖人)과 같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너는 나처럼 돌고 있느냐?”고 힐난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직감한다. 혹시 가정일이나 출판사일 등으로 돌기를 멈추고 죽어 있는 것 아닌가? 다른 도는 것에 의탁해서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고 술회할 수 있었다. 김수영은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돌기로 작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멈추어 선 사람만이, 혹은 스스로 돌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돌고 있는 사람만이 스스로 돌고 있는 팽이를 보면서 울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김수영은 운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 것 같은 설움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시인이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통찰로 자신의 첫 시집의 제목을 ‘달나라의 장난’으로 붙인 것은 아니다. <달나라의 장난>을 제목으로 붙인 진정한 이유는 이 시 후반부에 가서야 확인된다. 자기 이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투철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시를 통해 이해한 자기 자신이나 인간의 진면목은 항상 장밋빛을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사정은 반대인데, 대부분 제대로 포착된 자기의 모습은 상처투성이거나 때로는 벌레가 우글거릴 정도로 썩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팽이가 도는 모습을 보면서, 김수영은 서럽기만 한 인간의 숙명을 응시하게 된다. 그의 통찰은 돌고 있는 팽이들이 서로 붙으면 안 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돌고 있는 두 팽이가 마주치면, 둘 중 하나나 그들 모두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내팽개쳐지게 되는 법이다.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망하게도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다. 김수영의 말대로 “생각하면 서러운” 일이다. 보통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거나 완성되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이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서도 안 되고, 누가 기대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2, 184~186쪽)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며, 그러려고 해야 합니다. ‘나’가 없는 ‘우리’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겨우 다른 사람을 붙들고 있는 위태로운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전에 ‘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겠지요. 김수영 시인처럼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중요하지요.

  어린 아기가 걷기 시작할 무렵 부모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만 조금씩 앞으로 걷기 시작하면 그 손을 놓습니다. 그러다 넘어지면 부모는 일어나라고 말해주고, 일어나는 걸 버거워 할 때에 손을 내밀어 붙잡아 줍니다. 그리고 다시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손을 놓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기도록 부모는 잠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줄 뿐이지,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거죠. 세상에 태어난 지 15개월 된 둘째 딸은 불안불안하게 걷고 있는데,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걸을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팽이처럼 스스로 도는 힘을 갖기 위해, 어린 아이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나’를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되돌아봐야할 시간입니다.

 

2013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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